사찰및 문화

서암,벽송사

대봉산 2015. 10. 23. 15:42

서암정사(瑞庵精舍)

서암정사는 다른 여늬 절과는 달리 일주문이 없고, 두 개의 큰 돌로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일주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돌에 새겨진 글 뜻은 셀수 없이 수많은 강과 하천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한 맛이듯, 삼라만상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라는 뜻이라는... 서암은 역사는 50년 밖에 안됩니다. 벽송사의 산내 암자였죠. 원응스님이 벽송사로부터 독립사찰로 분리시켜 1965년에 불사하기 시작해서 오늘날에 모습을 갖춘 것입니다. 대웅전은 예전에는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었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지은지는 2012년에 완공했습니다.

 

사천왕상 :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님을 지키는 수호신이죠. 사천왕상은 원래는 그림이나 나무로 되어 있는데, 서암에는 돌에다 나란히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경주 석굴암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하였다고합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민간신앙이었다가 불교에 흡수되어 사천왕이라는 이름으로 호법신이 되었고,결국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가 일본에도 전달되는 동북아시아 불교국가들의 공통적인 문화코드라고 생각하면 될듯합니다. 인도에선 여방위신(귀족모습) 중국,우리나라로 전래 되면서 무장의 모습으로 변하게 됨)

 

동쪽-지국천왕(비파):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중생구제

서쪽-광목천왕(여의주):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

남쪽-증장천왕(보검): 선악에 대한 복과 벌

북쪽-다문천왕(보탑): 진리 추구

대방광문 : 크고 넓은 문이라는 뜻으로 화엄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불법의 모든 것을 한자로 함축된 글로 "옴"이라는 글자와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석굴법당 : 이 굴법당은 화강암으로 바위를 조각을 하였습니다. 아미타불 본존불을 모신 석굴법당인 극락전 안에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1 0대제자와 여덟보살,신장대,선재동자,염라대왕,십장생,동식물,천장에는 48개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문수, 보현보살,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도 모두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절의 주지이신 원응 큰스님께서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달래고자 1989년부터 석굴법당을 불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주불이 아미타불입입니다. 서방정토에 계신 부처님이시죠. 상처 많은 원혼들을 서방정토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석굴법당은 조성하는데. 원응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석공 홍덕희 거사가 11년동안 불력으로 조성했죠. 다 조성하시고 난후 원응큰스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불세계 불법이 부처님의 도량으로 이루어졌지 나의 도량으로 이루지지 않았다."

또 원응큰스님은 금니사경으로 유명하신 분이시죠!

대방광불화엄경은 58만 7,261자를 한지에 옮겨 적는데 5년 걸렸고, 그 위에 금가루로 다시 입히는 작업(금사)에 5년이 걸린 대 불사였습니다.(1985년부터 10년간)

배송대 :서암에는 다른 절에는 없는 배송대가 있습니다.

배송대가 뭐냐하면 유족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원하면서 영가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곳입니다. 자, 여기를 보십시오 ~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관세음보살과 왼쪽엔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하여 반야용선을 타고 영가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모습입니다

반야용선(부처님의 좌대)이란 “지혜를 이룬 용의 배”라고 하는데, 옛날에 시신을 묘지로 운반할 때 사용하던 용, 봉황, 연꽃등 으로 치장한 상여를 가르킵니다.

지금은 장례문화가 발달해서 상여를 보기가 어렵게 되었죠. 불법세계로 다 보내준다는 것이 이절의 테마입니다. 자,  이 영가를 훗날의 나라고 생각하고 두손모아 기도한번하고 돌아 서 보아요...

 벽송사 : 벽송사는 1520년(중종15) 벽송지엄대사가 중창한 절

1950년 육이오로 인해 불타 소실되었으나 재 중건 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벽송사 들어가는 입구에 나무 장승이 있는데, 왼쪽장승은 금호장군, 오른쪽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한다.두 장승은 사천왕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절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중 여자장승은 꼭다문 합죽이 입과 옴폭한 보조개 ,불에 탄 머리 남자장승은 짱구 왕방울 눈알, 얼굴 절반크기의 우뚝한 코, 참나무 조각 얼굴은  소박하면서도 질퍽하고 위압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또, 벽송사가 있는 마을을 광주리점, 강아리점이라고 한다.

송지암 스님이 득도하기 전 십년간 광주리를 만들어 팔던곳이라 유래된 이름이다. 송지암은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태어났다.10세전에 사서삼경을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장군으로 변방에 나가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격전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허망함을  느끼고 계룡산으로 들어가 불교수행을 한다.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하던 법계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 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정심대사는 이조 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싸리나무 광주리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허구헌날 송지암에게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 뿐,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송지암은 떠나겠다고 했다."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해라"는 말씀을 듣고 하산하다가 그말을 되새기며 되돌아와 법계대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솔함을 사죄하다 득도한다. 벽송대사기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대사는 열반에 들게 된다. 그 후 벽송이 많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법비를 내린다.

벽송사 도인송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어느 노승이 주장자를 꼽아 놓고 500년 뒤에 돌아 오겠다고 말하고 열반하였다. 주장자는 소나무가 되었고, 이후부터 도인송으로 불리게 되었다. 미인송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환성지안 선사를 남몰래 연모하던 부용이라는 낭자가 스님이 돌아가시자  '천년학이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벽송사에서 스님의 정녕을 수호하겠다는 서약이었다. 이후 항상  소나무엔 학 한마리가 앉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미인송이란 이름도 이때 얻었다고 한다.

벽송사 삼층석탑

벽송사 삼층석탑은 이단의 기단위에 장방형의 삼층탑신을 세운 통일 신라시대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탑이다. 벽송사의 창건 연대가 중종15년(1520)으로 미루어 볼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라양식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이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 돌의 네모서리가 면의 가운데 기둥모양 얕게 조각하였는데 특이한점은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 사이에 높직하게 딴돌을 끼워 놓은것이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한장의 넓은돌로 이루어졌으며 밑에는 수평으로 앏은 단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에 몸돌은 각층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지붕돌은 추녀가 얇고 반듯하며 마무리 부분에서 치켜오른 정도가 완만함을 알수있다. 하지만 지붕들 윗부분은 경사가 급하고 치켜 올림의 정도도 심하게 보이는 것 또한 이 탑의 특징이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복발과 노방만 남아 있어 허전함을 보여주고 세월에 의해 훼손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용유담; 휴천면과 마천면 경계지점에 용유담이 있다. 물살이 쉬엄쉬엄 흐른다고 휴천,물살이 말달리듯 흐른다고 마천, 휴천과 마천이 장구한 세월동안 빚어놓은 용유담 거북바위를 비롯해 수많은 바위들은 신이 빚어낸 조각 예술인듯 아름다움의 극치다. 용이 사는 곳이라 하여 남명 조식 선생은 살아 생전 3번이나 용유담을 찾았다고 한다.

지리산 북쪽에서 흐르는 물과 전북 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서 엄천강을 이루어 산청을 흘러 진주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용유담은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재직시  기우제를  지냈던곳이기도 하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 보내면 그 나귀가 엄천사로 가서 식료품과 생활 필수품을 싣고 와서 용유담가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용유담에 살고 있는 아홉마리 용에게 다리를 놓게해서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놓고 장기에 몰두하느라고 시간가는줄 모른다.그때 용유담에서는 눈먼 용을 제외한 8마리 용이 서로 하늘에 승천하겠다고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나귀는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자 나귀는 그대로 지쳐 죽었다. 나귀가 죽은 것을 안마적도사는 분을 참지 못해 장기판을 냅다 팽겨쳤는데 한쪽은 마적에 남아있고, 다른 한쪽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에 있다.나귀가 죽은바위를 나귀바위라 이름한다.마적은 눈먼 용만 남기고 여덟마리는 쫒아버렸다. 먼훗날 송전리 주민들은 마적에 새길을 내야했다.이 나귀 바위를 폭파하지 않고는 새길을 낼수가 없었다.주민들은 부득불  나귀바위를 폭파했다. 이때 말방울 16개가 나왔다.신라 무열왕(659) 법화사와 같이 창건한 마적사 마적도사가 절을 떠나던날 배나무 한그루를 절에 심었다.이것이 죽으면 나도 죽은줄 알아라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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