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정사(瑞庵精舍)
서암정사는 다른 여늬 절과는 달리 일주문이 없고, 두 개의 큰 돌로 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일주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돌에 새겨진 글 뜻은 셀수 없이 수많은 강과 하천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한 맛이듯, 삼라만상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라는 뜻이라는...
서암은 역사는 50년 밖에 안됩니다. 벽송사의 산내 암자였죠. 원응스님이 벽송사로부터 독립사찰로 분리시켜 1965년에 불사하기 시작해서 오늘날에 모습을 갖춘 것입니다. 대웅전은 예전에는 일반 가정집처럼 생겼었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지은지는 2012년에 완공했습니다.
사천왕상 :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님을 지키는 수호신이죠. 사천왕상은 원래는 그림이나 나무로 되어 있는데, 서암에는 돌에다 나란히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경주 석굴암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하였다고합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민간신앙이었다가 불교에 흡수되어 사천왕이라는 이름으로 호법신이 되었고,결국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가 일본에도 전달되는 동북아시아 불교국가들의 공통적인 문화코드라고 생각하면 될듯합니다. 인도에선 여방위신(귀족모습) 중국,우리나라로 전래 되면서 무장의 모습으로 변하게 됨)
동쪽-지국천왕(비파):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중생구제
서쪽-광목천왕(여의주):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
남쪽-증장천왕(보검): 선악에 대한 복과 벌
북쪽-다문천왕(보탑): 진리 추구
부도는 누구의 무덤?
부도는 스님의 무덤이고, 탑은 부처님의 무덤?
대방광문 : 크고 넓은 문이라는 뜻으로 화엄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불법의 모든 것을 한자로 함축된 글로 "옴"이라는 글자와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좋을긋 같습니다.
배송대
서암에는 다른절에는 없는 배송대가 있습니다.
배송대가 뭐냐하면 유족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원하면서 영가를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곳입니다.
자, 여기를 보십시오 ~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관세음보살과 왼쪽엔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하여 반야용선을 타고 영가를 서방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모습입니다
반야용선(부처님의 좌대)이란 “지혜를 이룬 용의 배”라고 하는데, 옛날에 시신을 묘지로 운반할 때 사용하던 용, 봉황,연꽃등 으로 치장한 상여를 가르킵니다.
지금은 장례문화가 발달해서 상여를 보기가 어렵게 되었죠. 불법세계로 다 보내준다는 것이 이절의 테마입니다.
자, 이 영가를 훗날의 나라고 생각하고 두손모아 기도한번하고 돌아 서 보아요...
석굴법당
서암은 역사는 50년 밖에 안됩니다. 벽송사의 산내 암자였죠. 원응스님이 벽송사로부터 독립사찰로 분리시켜 1965년에 불사하기 시작해서 오늘날에 모습을 갖춘 것입니다.그렇다면 50년밖에 안된절이 이렇게나...하고 선생님들께선 의아하시죠! 이 절의 주지이신 원응큰스님께서 6.25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달래고자 1989년부터 석굴법당을 불사하기 시작합니다.그래서 이 절의 주불이 아미타불입입니다. 서방정토에 계신 부처님이시죠. 상처많은 원혼들을 서방정토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석굴법당은 조성하는데. 원응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석공 홍덕희 거사가 11년동안 불력으로 조성했죠.다 조성하시고 난후 원응큰스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불세계 불법이 부처님의 도량으로 이루어졌지 나의 도량으로 이루지지 않았다."
이 굴법당은 화강암으로 된 산을 다 파내고 조각을 하였습니다. 아미타불 본존불을 모신 석굴법당인 극락전 안에는,관세음보살,지장보살,10대제자와 여덟보살,신장대,선재동자,염라대왕,십장생,동식물,천장에는 48개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현보살,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도 모두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자비의 눈으로 모든 존재를 끊임없이 굽어 살피시는이(33개의 몸으로 화신)
○선재동자-화엄경에 의하면 선재동자는 복성장자의 아들로 일체의 진상을 알고자 하여 문수보살의 안내를 받아 천하를 여행하며 53인의 선지식인을 찾아가 질의응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가는 불교신앙의 모범적인 구도자다.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십대원을 들은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입법계의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함.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중에서 28번째로 방문한 분이 관음보살이시죠. 관음보살에게 법문을 청해 듣는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에 보면 선재동자는
두손을 가슴 앞에 합장한채 관음보살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선재동자는 500명의 동자와 500명의 동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합장은 왜 할까요? 합장은 존경과 공경의 표현입니다. 손바닥을 함께 붙이고 모우는 것은 둘이 아닌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나한(아라한)- 부처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를 말하는데, 아라한이라고도 하죠(16나한)! 초자연적인 신통력과 독특한 표정과 자유스러운 자세를 하고 있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때까지 중생들을 제도 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신곳,지장이라는 말은 땅지자에 ,감출장이다. 땅속에 자기 몸을 감춤.
○금니사경 : 대방광불화엄경은 58만 7,261자→한지에 옮겨 적는데5년→그 위에 금가루로 다시 적는 금사에 5년이 걸린 대불사였다(1985년부터 10년간)
○사경수행 : 사경수행은 “선수행과 상용한다“고 해석
사경은 선과 함께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수행법이다.사경은 불교의 경전을 다른 종이에 옮겨 적는 불교의 전통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사경을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참회기도와 함께 모든 생명의 행복과사회의 평화를 위한 발원을 하고, 글한자 한자에 절한번, 혹은 글 한줄에 절 한번을
할만큼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웅전 :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
대적광전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명부전 :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
나한전(아라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갔으나 부처님이 되지 못한 16 나한을 모신 전각
약사전 : 약사여래를 모신전각
독성각 : 나반존자를 모신곳
칠성각 : 칠성여래를 모신곳
삼신각과 삼성각은 -독성,칠성, 산신을 모신곳
세계4대 성자 :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세계5대종교 : 불교,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유대교.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구원"임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송광사
하안거 :승려들이 음력 4월15일~7월15일까지 석달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선방에 모여 참선 수행하는것을 말함
심우도
"소"라는 동물은 그 깨닫는 마음을 세부적으로 지칭할때 주로 차용한다. "심우도"라고 하여 사찰의 외부 벽화에는 대부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여기서 소를 찾는 과정은 인간이 우매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참된 道의 세계로부터 멀어졌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다시 말해서 주인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돌아오는 열개의 그림은 우리 중생들의 본래 면목인 참 마음자리,즉 부처의 진애 세계에 도달하는 수행의 단계를 의미한다.소의 비유에서 "소를 찾아 나서는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과정이고,"소를 보았다는 것은 " 본성을 찾은 초견성의 마음이고, "소의 고삐를 잡고 등에 타고 집에 오는것"은 깨달은 마음이 요지부동하도록 보임하는 기간이고,"소를 찾아 외양간에 매어놓고 소를 찾았다는 생각마저 잊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마음마저도다 잊고 참 도인이 되어 탕탕무애 걸림없이 주유천하 하는것이 소의 상징인 셈.
서암정사
산 깊고 물 맑으니, 이곳에 드는 이의 마음이 절로 청정해진다. 서암정사는 지리산 산맥 위에 앉아 천왕봉을 멀리 바라보고, 한국의 3대 계곡으로 유명한 칠선계곡을 마주하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하고 있다. 추성리 갈림길에서 널찍한 도로를 따라 400m 가량 표지판을 쫓아가면 '백천강하만계류, 동귀대해일미수'(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내 흘러, 바다에 돌아가니 한물맛이로다)란 돌기둥이 참배객을 맞는다. 바로 서암정사의 입구다.
서암정사는 '지리산에 펼쳐진 화엄의 세계'란 별칭이 말해주듯, 온 도량이 불교의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갖가지 장엄한 마애불로 채워져 있다. 서암정사의 중심은 불경속 극락세계의 장엄함을 바윗굴 속에 재연해놓은 극락전 석굴법당이다. 이곳에는 아미타불을 위시해 8보살, 10대제자, 신장단 등이 장엄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돼 있다. 이와 더불어 천연거암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비로전, 독수성, 주산신, 배송대, 용왕단 등은 불경에 담긴 갖가지 형상을 보여준다. 도량 곳곳의 석조 현판과 주련, 비석에 새겨진 글귀들은 광대한 부처님의 진리를 암시하고 있다.
서암정사는 원응(元應)스님이 1960년대 중반부터 터를 이루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원응스님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던 이곳에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인류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발원으로 불사를 시작했다. 서암정사에는 또 원응스님이 15년간 서사해 완성한 약 60만 자로 이뤄진 금니화염경(金泥華嚴經)을 비롯해 다수의 사경 작품이 소장돼 있다. 원응스님의 사경은 한국불교에서 단절됐던 사경수행(寫經修行) 전통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서 다양한 불교 석조각과 한 스님의 사경수행 과정을 잔잔히 음미할 수 있는 곳이 서암정사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서암정사(함양)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서 암정사의 유래 -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민족의 미극이 유난히도 치열하고 깊었던 이곳 지리산(智異山), 1960년경 전화(戰禍)가 지나간 지 한참 뒤이지만 산간오지(山間奧地) 두메산골인 벽송사(碧松寺)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대자연(大自然)의 섭리가 인연(因緣)에 사로잡인 인간들의 희비에개의치 않나니, 한 때 천지를 진동하던 총성과 온 산을 뒤덮었을 포연(砲煙)의 폭풍이 휩쓸었을 이곳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는 듯 산새가 지저귀고 봄이 오니 꽃이 핀다.
오늘날 서암정사(瑞庵精寺)가 있게 된 것도 역시 억겁(億劫)의 인연과 대자연이 빚어낸 조화의 한 그림자가 아닌가 한다. 문득 지난 일을 회상하니,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 어느 날 복잡한 도시인 부산을 뒤로하고 청산(靑山)에 파묻힐 양으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정처 없이 흰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 벽송사다.
인적도 드믈어 한적한 산사(山寺)벽송사, 때로는 감자를 심어 끼니를 때우고 몸소 흙더미를 치워가며 이어지는 수행생활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너무 힘이 들고 갈등도 많이 생겨 여기를 떠나버릴까 하는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가 새는 법당에 탈금(脫金)이 다 되어 새까만 모습으로 초라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들여다보며 망설이기를 거듭하면서 그럭저럭 눌러앉아 "여기가 또한 인연지(因緣地)려니.."여기고 폐허를 수습하다 보니 어언 10여 성상(星霜)이 훌쩍 흘렀다. 구석구석 묵은 쑥대가 나부끼는 1970년대 초의 어느 포근한 봄날 오후,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조용히 경내를 거닐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잊혀져 가는 묵은 옛길을 따라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에 이끌리듯 와서 멈춘 곳이 바로 오늘의 서암정사 터다.
석굴법당 조성造成 경위
이곳이 만년도량(萬年道場) 의 성지(聖地 )임을 확신하고 산승(山僧)이 도량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사람이 일부러 깍아놓은 듯한 거암, 즉 지금의 석굴법당 전면(前面)에 다다른 순간 몸과 시선이 굳어진 듯 멈추었다.
"여기로구나, 아! 좋구나...."
조용히 눈을 감고 부처님의 영산회상, 그리고 아미타상을 상상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도하면서 염원(念願)의 심층에서 떠오르는 어떤 영상(影像)을 느끼니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세계(世界)로다.
전쟁의 참화(慘禍)로 이 주변 지리산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혼(寃魂) 들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으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人類)가 부처님의 대자비(大慈悲) 광명 안에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 가 실현되기를 발원(發願)하면서 부처님을 조성하게 된다.
조성과정의 이야기들
서암정사는 대자연의 섭리가 빚어낸 조화로 준비된 장소에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공덕이 보태지면서 비로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30여년 전 불사(佛事)를 시작한 이래 적지 않은 난관과 고초를 겪었지만 좌절하지않고 장엄한 사찰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불보살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주 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 공덕과 더불어 석공들의 공덕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홍덕회, 이종원,이승재, 이금원, 이인호, 맹갑옥 석공은 지극한 정성과 노력으로 한치의 흘림 없이 조각을 완성했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겉석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조각(細彫刻 )으로 마무리 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여러 석공 중에서 특히 홍덕희 석공은 서암정사에서 10년 이상 머물면서 석굴법당을 위시해 사자굴의 모든 조각을 마무리 했다. 마천면 추성리와 의탄리의 몇몇 인연이 있는 분들은 처음 터를 닦을 때부터 시작해 도량 조성 과정의 크고 작은 일에 큰 힘을 보탰다.
험한 장소에서 도량을 조성하다보니 뜻밖의 사고로 자칫 불사가 중단될뻔 한 적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불보살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20여 년 전쯤일까. 지금의 사천왕성 맞은 편에 있는 돌탑을 쌓을 때였다. 탑 쌍기를 끝낼 무렵 점심시간이 되어 일꾼들을 태워 경운기를 재조한 짐차(일명 탈탈이)을 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렸다.
운전자를 포함해 일곱 명이 탄 짐차는 걷잡을 수 없이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짐차가 쌓고 있던 탑에 부딪혀 탑을 무너뜨리고 멈춘 덕분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대형사고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점검해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무너지 돌 더미 속에서 옷자락이 내다 보였다. 황급 결에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무너진 돌 더미를 치워내자 탑 쌓는 기술자가 모로 누워 기절한 채 돌 밑에 깔려 있었다. 호흡도 거의 끊어져 있었으나 한 참 뒤에야 돌아왔다.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한 결과 갈비뼈 3대만 부러지고 다른 곳은 이상이 엇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를 이 사람은 사고가 나는 순간 비몽사몽간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낀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입원해 있을 때도 같은 노인이 나타나 밀치는 바람에 병상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상처로 인하여 신체가 허약해지고 정신이 극도로 혼미해질 때 관세음보살이나타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사진 우측의 미타굴은 서암정사 대웅전 중창불사를 위해서 지금은 그자리를 대웅전이 들어섰다.
출처- 서암정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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