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상의 고향으로서 산
우리처럼 넓은 평야나 광활한 초원이 없는 땅에 살다보면 산은 누구에게나 삶의 고향이요
동시에 죽음의 휴식처가 아닐 수 없다.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 같다.
도시로 뻗은 길과 산으로 돌아오는 길
1797년 여름이었다. 석류꽃이 처음 필 무렵 내리던 부슬비도 때마침
개이자, 정약용은 고향 소내에서 천렵하던 생각이 간절하였다.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잠깐 몰래 도성을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왔다. 친척·친구들이
얼마나 반겼을까. 작은 배에 그물을 서둘러 싣고 나가, 잡은 고기를 냇가에 모여 실컷 먹었다. 그러고 나자, 중국의 진나라 장한이 고향의
노어회와 순채국이 먹고 싶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때가 마침 산나물이 향기로울 때라는 것을 깨닫고,
형제·친척들과 함께 앵자산의 천진암으로 들어가 냉이, 고비, 고사리, 두릅 등 산채들을 실컷 먹으며 사흘이나 놀면서 20여수의 시를 짓고
돌아왔다 한다.
한반도는 7할이 산으로 덮여 있으니 우리는 산에 둘러싸여 살았다. 양지바르고 아늑한 산자락이면 으레 크고 작은
동네가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다. 이 산에서 온갖 산나물을 뜯어다 먹었으며, 또 땔나무를 해다가 불을 피우고 살아왔다. 도시기 발달하기 전에는
사실상 산자락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으면 산기슭에 묻히는 것이 우리 삶의 필연적인 과정이었으니, 사실 양택과 음택이 그 산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리처럼 넓은 평야나 광활한 초원이 없는 땅에 살다보면 산은 누구에게나 삶의 고향이요 동시에 죽음의 휴식처가 아닐 수 없다.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머리 속에 깊이뿌리 박혀 있는 것 같다.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비들로서는
그들의 생활세계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 있는 길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다. 벼슬로 향하는 길과 산으로 향하는 길의 두 방향이다.
벼슬로 향한 길·은 서울로 나아가는 길이오, 세상에 나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화려한 길이며. 동시에 시끄럽고 티끌 자욱한 세속에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으로 향한 길'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숲이 우거진 산골의 초야에 묻혀 사는 한가로운 길이며, 동시에 맑은 생각을
가다듬고 밝은 지혜를 기르는 학문에로 들어가는 길이다.
'벼슬로 향한 길'에는 부귀공명이 따르고 가슴에 품었던 회포를 풀어 세상을
구원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조는 물러나는 것을 더욱 고상하게 여겼던 것 같다. 벼슬을
버리고 산야로 물러난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요, 범상한 인간으로서는 쉽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산으로
돌아오면 학문을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라 본다. 맹자는 "출세를 못하면 자신의 덕을 선하게 닦고, 현달하면 천하를 아울러 선하게 한다"라 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와 초야에서 곤궁하게 살 때에 선비가 하여야 할 각각의 도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온 천하를 선하게 하기는 어려워도 자신의
인격을 선하게 하기는 좀더 쉬울 것이라 생각할 터이고, 동시에 자신의 덕을 선하게 하는 '수양'은 온 천하를 선하게 하는 '경세'의 뿌리가 되는
만큼 먼저 수양하는 것이 마땅한 일로 강조하게 된다. 그만큼 벼슬에 나가고 출세하기를 서둘기보다는 초야에 묻혀서 내면에 실력, 곧 학문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도시에 사람들과 어울려 있노라면 마음이 번잡하고 어지러워 학문에 정진하기 어렵다고 본다.
산 속의 그윽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고요한 가운데 독서하고 사색함으로써 정밀하고 순수한 학문을 연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는 이
산골짜기에서 학문의 연원이 열려 이 시대의 사상을 풍성하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산에서 닦는 공부는 도시의 거리에서 하는 공부와 그
내용도 달라질 것이다. 도시에서는 실용적 기술이나 현실문제에 관한 지식을 연마하는 동안 산곡에서는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궁리하는 철학이거나
인격과 도덕성을 연마하는 수양론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산은 우리의 삶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산실이었으며 사상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산과 물이 어울린 삶터
수도하는 사람이 머물던 산은 그 수도의 이상과 방법에 따라 위치가 같지
않다. 유학자, 선비들이 즐겨 살던 산은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산자락에다 그윽한 계곡을 따라 맑고 잔잔한 냇물이 흐르는 곳이면 더할 수 없이
좋다. 너무 험하고 높은 산도 피하고 너무 깊고 물소리가 험한 곳도 피한다. 이러한 터는 들판의 평평한 지대와 높고 깊은 산의 중용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전통의 문화에서 삶과 죽음을 감싸고 우리의 사상을 잉태해 왔던 터는 높고 험한 산이 아니라 맑은 기상이모인 산자락에
그윽한 계곡을 끼고 있는 아늑한 자리이다.
이에 비해 산승들과 도사들은 높고 깊은 산에 험하고 기괴한 바위와 깊은 못이 있는 곳을
찾아 수도의 자리로 삼는다. 깊은 산은 세속을 초월하여 곡식을 끊고 솔잎을 씹으며 심신을 닦음으로써 살아서 자기 몸이 부처가 되거나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는 수도의 목표에 적합한 자리요, 허무·공적의 진리나 불로장생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자리이다. 특히 수도승
가운데는 때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경관이 빼어난 명산을 찾아 '구름과 물'[운수]처럼 사방으로 산천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수도자들이
산을 좋아하는 것은 산이 수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수도자들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속을 단호하게
끊고서 깊은 산 속에 머물면서 생사를 넘어선 탈속한 진리를 찾아간다.
반면에 선비들은 비록 산 속에 한가롭게 심신을 수양하면서도
언제나 대중들의 세상을 내다보고 그 세상을 위하여 유용한 도리를 닦아가고 있다. 그러나, 산자락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선비들의 거처는 세속과
떨어졌으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부잡불리]는 성리학의 이기관계의 개념과 통하는 것이다.
산이
지닌 어떤 조건이 수도하기에 좋은 것일까. 무엇보다 번잡함을 벗어나 정적이 깃든 곳이니 정신을 집중하기에 좋고, 맑은 바람과 푸른 숲은 우리의
기개를 펼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상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청년시절 집중하여 독서할 때는 더욱 고요한 분위기를 구해서 산자락의 집을
두고도 산 중턱에 있는 사찰을 찾아가는 일이 흔하였다. 기도나 치성을 드리고 싶을 때는 여러 가지종교단체와 더불어 민속신앙인들도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 그만큼 산은 종교적 거룩함과 학문적 깊은 사색에 적합한 곳이요, 이 산에서 종교적 신앙이 깊어지고 학문이 정밀하게 다듬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산과 물은 음양의 관계와 같으니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야 전체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산과 물은 모순된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대대관계라 할 수 있다. 산의 우뚝함은 물의 깊숙함과 대조되어야 더욱 뚜렷해지고, 산의 고요히 부동함은 물의 쉬지 않고
흘러가는 유동과 서로 대조를 이루니, 바로 산과 물[산수]이 어울린 곳에 인간의 삶과 예술, 학문과 종교가 더욱 깊고 경건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산마루에서 열리는 안계
선비들은 산자락이나 시냇가에서 집터를 닦아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깊이
산 속으로 들어가 노닐고[유산] 산을 오르는[등정] 것은 높이 오르며 학문과 수양의 향상하는 자세를 체험하며 가슴속의 기상을 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도 산마루에 올라 툭 터지는 시야와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더욱 잘 길러질 수 있는 것이다. 산정에
올라서는 누구나 가슴을 활짝 펴고 힘껏 소리라도 질러보면 우리의 웅크렸던 기상도 시원하고 활달하게 터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전통적
신념에 따르면 산에는 정기가 있고, 산 아래 살거나 산을 오름으로써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인간의 정신은 더욱 깊고 큰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많은 유산록이 있지만 정구(호 한강)는 가야산을 오르면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고 느낌을
표현하였다.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며 가슴을 씻어내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고정된 관심과 유혹을 받아 일어나는 욕심의
열기를 식히고 일상생활의 형식적 관습으로 억눌린 생각과 정서를 풀어주는 것은 공부를 하는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곧, 산에 오르는 것은 안계를
넓히기 힘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넓히는데 힘써야 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평소에 독서를 하다가도 자주 뜰을 거닐며 기상을
펴도록 권유하고, 독서를 하다가도 책을 덮고 사색을 함으로써 학과 사를 병행하도록 요구하며, 낮에 힘을 소모하는 활동과 더불어 밤에 생명을
기르는 야기를 배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수양과 학문에는 정적 요소와 동적 요소가 음양의 양면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바로 정적인 독서의 웅크린 자세를 펴고 가슴에 맺힌 기상을 펼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정구는 산에 오르면서 깨닫는 공부가 바로
"어진 사람이 산을 보고 자성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남명이 말한, "선을 따르는 것은 오르는 것처럼 하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지는 것처럼
하라"는 훈계도,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에서 선을 행하는 향상의 자세를 익히며, 산을 내려오는 안이함에서 악을 행하는 타락의 성격을 다시 음미하고
있다.
산마루에 올라 툭 터져 시원한 전망을 갖는 것은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의 공부를 계속하여 쌓아 가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시원하게 툭 터지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활연관통한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산마루에서 멀리까지 열리는 시원한 안계는 바로 학문의 오랜 축적과정을
거쳐서 통달하게 되는 극치의 경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퇴계는 유소백산록에서, "처음에 답답하게 막혔던 것이 필경은 쾌함을 얻은 것이다"라
언급함으로써, 동시에 학문하는 과정과 깨달음의 단계를 등산의 과정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산마루에 오르면 더 넓은
세계가 안계에 들어오면서 자신의 시야가 넓어진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동시에 더 넓은 세계가 눈 안에 들어오게 된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한다. 공자를 따라 산마루에 오르는 것은 세계를 한 눈에 담는 것이요 광대한 도를
깨우치는 것이다. 김종직이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를 보고 한유가 형산에 올랐던 사실을 사모하였다는 것은 단지 등산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넓은 안목을 체득하고자 한 것이리라.
산림에서 닦는 의리정신
조선 초기의 도학자들은 정몽주, 길재의 도통을 이어
사림파를 형성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훈구세력들과 대결하였다. 이때 사림파가 내세우는 가치관의 중심은 절의를 숭상하는 것이었으며,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절의론에 따라 정몽주는 죽었고 길재는 조선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산야에 묻혀 살았다.
또한 세조의 왕위찬탈에 따라 정인지, 신숙주 등의 훈구공신세력에 대해 사림세력은 여전히 초야에 묻혀있어야 했으며, 조광조를 따라
신진사류들이 잠시 등장하였다가 거듭되는 사화에 더욱 깊이 산간으로 은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체로 말하면 사림파의 활동기반은
산야요, 훈구파의 활동기지는 서울로 정착되었다. 산야에 파묻혀 학문을 연마하고 절의를 숭상하는 사림, 곧 선비의 의식은 불의와 세속적 탐욕에
비판적인 의리정신으로 무장되었으며,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의리정신은 산림에서 활동하는 '선비정신'으로 확립되었다.
의리정신을
신념으로 삼는 선비는 벼슬에 나갔더라도 언제나 아무런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산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으며, 혹은 처음부터 벼슬에 나가기보다
산수가 아름다운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 전념하기로 뜻을 세우고 있다.
산 속에 은거하여 산과 물[산수]에 어울리고 바람과
달[풍월]을 완상하며 아담하고 청신한 자연경관 속에서 자락하며 학문하는 선비의 삶이 이미 세속의 유혹을 끊고 세속의 탐욕을 견제하는 저항적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지만, 한 말 도학자들은 더욱 깊은 산 속으로 찾아 들어와 유교이념과 전통문화를 고수하면서 일제의 침략세력과 접촉도 타협도
거부함으로써 적극적인 항일저항의식을 지켜왔다. 이러한 역사적 헌실 속에서 산은 한국사상과 선비정신을 보호하고 배양하는 온상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산 속에 은거하며 세속과 거리를 두거나 침략세력과 단절한 가운데 저항의식을 지키는 것은 세속을 변화시키거나
침략세력에 항쟁하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폐쇄적 안정을 탐하다가 저절로 쇠퇴하기 쉬운 소극적 성격의 폐단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속에서 닦아간 학문에도 적극적 변혁사상이 있다. 변산의 우반동에 은거하였던 유형원이나 강진의 다산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던 정약용의 경우처럼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적극적 개혁사상도 상당부분 산 속에서 생산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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