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에 관하여
430년전 홍랑과 최경창은 지극한 사랑을 합니다.
최경창(1539~1583)은 전라도 영암출신으로 시와 시화에도 뛰어 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고 합니다.
선조때 삼당시인(최경창, 백광훈, 이달)중의 한명이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등과 함께 8문장가으로 불리웠습니다.
1573년 (선조5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하면서 홍랑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관리들이 부임하면 관청소속의 기생들을 소집점검합니다.이때 관리들과 기생들의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점고하고 하죠.
홍랑과 최경창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술과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알아본 최경창과 홍랑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뒤에 아들 (즙)을 한명 두게 됩니다.
그러나 기생과 관리와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지요.
임기가 끝나면 자연적으로 이별이 되는것입니다.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 변방의 군사요충지는 이 지역주민들조차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었고,
결혼도 타지역과 하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관청소속 기생들은 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겠죠.
최경창이 임기가 끝나 경성을 떠날때 홍랑은 함경도 함흥까지 따라와 이별을 고하고, 또 송별시를 써 최경창에게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것입니다.
"묏버들가지 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간밤 봄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라는 시에
고죽(최경창의 호)은 다음과 같은시로 화답을 했다고 합니다.
"옥같은 뺨에 두줄기 눈물 흘리며 한양을 떠나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적삼에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풀빛 아스라이 홀로가는것을 전송하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난초)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나는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이후 1575년에 최경창이 병을 얻어 봄부터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밤낮으로 걷고 걸어 7일만에 서울에 도착해서 최경창과 재회를 하고 함께하지만
붕당이 심했던 당시에 명종비 인순왕후 국상과 북방지역 사람의 도성 출입을 두고
사헌부에 탄핵을 받아 1576년 파직되고 맙니다.
그후 최경창은 변방 지역을 전전했고, 1583년 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 오던중 객사합니다(불과 나이 45세)
홍랑은 최경창 무덤에서 시묘3년을 살며 무덤을 지켰고, 얼굴을 훼손시켜 뭇 남성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자 최경창의 시와 유품을 모아 정리하여 해주최씨 가문에 전달하고
자신은 고향(함경도 홍원)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쳤다.
당대의 문장가 최경창과 동거 기간은 불과 6개월 남짓이었지만,
한 남자를 헌신적으로 사랑 하였던 홍랑
살아서는 천민이었지만 죽어서 양반이 된 사람은 평양기생 홍랑뿐이다.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묻히고, 기생으로 유일하게 사대부족보까지 올라간 사람이 바로 홍랑입니다.
최경창과의 애톳한 사랑이 해주 최씨의 문중까지 감동을 시켰기 때문에,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그녀의 무덤이 있습니다.(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위치한 해주최시 문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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