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추사
용추계곡의 원래 지명은 심진동계곡이었지만,용추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지금 이 인근 일대를 모두 용추계곡이라 불린다.
용추사는 원래 장수사의 4대 부속암자중의 하나였다. 장수사는 신라 소지왕9년(487년)에 각연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해인사 창건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802년)보다 315년 앞선 고찰이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이라는 명목하게 아군에 의해 소실되어 일주문만 남아 있을뿐 다른 흔적은 거의 없는 상태다. 용추사의 전신인 장수사는 설파 상언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강의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발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지낸 은신암이라는 암자가 있는 곳이다. 신라시대 고찰인 장수사는 승려가 2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장수사에서 쌀을 씻으면 살뜨물이 안의 광풍루까지 흘러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또한 나무짐을 지고 아궁이로 들어가서 불을 지피고 나왔다는 설도 있다.
용추사 입구에는 오래된 전나무가 두그루 있었는데, 한그루는 이미 전나무 비짜루 병에 의해 고사해서 베어 버렸고,
나머지 한그루마저 이렇게 비짜루병에 시달리다 목숨을 다한것 같다.
용추폭포 주변과 용추사 입구에 전나무들이 다 이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다.
용추폭포(높이15m): 폭포위에서 볼때 왼쪽으로 한번 돌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다음에는
한 가운데로 쏟아져 내린다.
용추계곡은 사시사철 강수량이 풍부해,1792년 연암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있을당시,
용추계곡 초입 안심마을에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군민들의 생활의
편리함을 주었습니다.
또한 용추계곡 일대에는 용추자연휴양림, 기백산군립공원, 정유재란시 혈전이 있었던 황석산성,
거망산등의 경관이 아름다운 1,000m 이상의 산들이 우뚝 서 있어 등산하기도 좋은 곳입니다.
용추폭포 아래 위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계곡의 아름다움은 가을이면 그 절정에 이릅니다.
가을단풍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10월 중순부터 말까지가 절정)
은신암과 무학대사
은신암은 조선태조때(1394년)에 이성계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무학대사가 서울 도성의 터를 잡은후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수도정진 하던 곳이다.무학대사가 이곳까지 내려온 까닦은 다음과 같다.
무학대사는 고려말기부터 조선조 초기까지의 사람이며, 이성계의 꿈을 풀이해준 연유로 인해 이성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왕사가 된다. 이성계가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를 치고 정권을 탈취하여 조선을
세우고 난후의 일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 당시의 서울을 개경에서 다른곳으로 도읍을 옮겨 궁궐을 새로
지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새로운 서울이 될만한 곳을 찾으라는 명령를 무학대사에게 내렸던 것이다.
무학대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여러곳을 물색하며 돌아 다니다가 한양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명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지라 이곳에 도읍을 할만한 곳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곳이라 생각 하였다.
그러나 무학대사도 야심이 있고, 욕심이 있었다. 이곳에 큰절을 세워서 불교를 널리 포교할것을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런뜻은 속으로 감추고, 한양을 뒤로 하여 충청도 계룡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계룡산에다 터를 잡고 부지런히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개국공신 정도전이 계룡산으로 내려가 살펴보고는 무학대사가 품고 있는 야심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 낼수 없어 조용히 해결하고자 지혜를 짜 내었다.
공사를 중지시키기 위해서 돌에다가 "요망스런 중인 무학이 정씨가 도읍할 땅에 와서 덤빈다"는 내용의
글을 돌에 새겨 땅속에 묻었다. 정감록에 보면 "계룡산은 정씨의 도읍이지 이씨의 도읍이 아니다"라고
무학이 품고 있던 욕심을 깨우치기 위한 정도전의 계책이었다.
부지공사를 하다가 땅속에서 인부가 파낸 돌비석을 보고 무학대사는 아연실색을 하며, "내 생각이 탄로 났구나"
할수 없이 무학대사는 하던 공사를 중지하고 한양으로 되돌아 갔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왕십리에 궁궐터를 정하고 부지공사를 착수 하였다.
정도전이 무학의 술책을 알고 또 돌에 "왕십리", 즉 십리를 더가서 공사를 하라는 뜻을 돌에 새겨 땅속에 묻었다.
공사하던 인부가 돌을 주워 무학에게 보이니 무학도 이제는 어찌할수가 없어, 야심을 버리고 지금의 터에
궁궐공사를 착수 했다고 한다. 서울의 왕십리란 지명이 이러한 연유로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궁궐을 짓게 되었지만, 다 지어지면 궁궐이 무너지고, 또 지으면 무너지고 하니 무학도 마음이
두려움이 생기고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날 산중의 깊은 산골을 걷는데, 산비탈에서 소를 몰고
밭을 갈던 노인이 "이랴, 이놈의 소야 무학보다 못한놈" 이라고 소를 꾸짖으며 소를 고삐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무학은 그 노인에게 "여보시오 노인장,어찌하여 무학을 소에 비교하오?" 하고 물었다.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서울 궁궐터가 학의설이라 학을 날지 못하게 네곳을 눌러놓고 궁궐을 지어야 할 것이네,
그것도 모르고 집을 지으니, 학이 날개를 치면 지어놓은 궁궐이 무너질수 밖에 없는것 아니요.
이런 이치를 모르니 무학이가 소보다 나을것이 무엇이오" 하고 말을 마치고 간곳이 없어졌다.
이말을 들은 무학은 너무나 기뻐서 노인의 말대로 네곳에 사대문을 먼저 세워놓고 궁궐을 지었더니,
과연 노인의 말대로 훌륭한 궁궐이 지어졌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정도전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다. 언제 무학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학이 품었던 욕심을 떠벌릴지 모른다.
즉, 지금의 궁궐터에 큰절을 지을려고 도읍터를 충청도 계룡산에다 잡았다가, 정도전에 발각되어 중지하고,
왕십리에서하다가 다시 발각되어 중지한 일들을 언제 폭로할지 모른다.
이러한 사싫을 왕에게 알리는 날에는 무학의 목이 열개라도 살아 남을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안심하고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마음이 항상 불안했던 무학은 그 길로 몸을 피하기 위하여 각 처를 헤메다가
이곳 안의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학은 경치가 아름다운 심진동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우편에
매바위가 있는것을 보고 보았다. 이 매바위는 산중턱에 튀어나온 자연석의 큰바위 형상이 날개를 오므리고
부리를 아래로 하고 쉬고 있는 형상이다. 누구의 설명도 필요없이 아무라도 이길을 올라가면 이 바위가 눈에
띄는데 금방 매바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무학은 매바위가 있으니 트림없이 꿩설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변의 지형을 찾아 다니다가 보니 과연 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지형이 있어 그곳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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