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모든것

함양에 대해

대봉산 2016. 10. 7. 11:35

함양은 경상좌도의 안동(安東)과 함께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선비고을로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유적과 선비고을에 걸맞게 서원(書院)과 정자(亭子)가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 상의 덕유산군(德裕山群)과 지리산군(智異山群)의 산줄기를 경계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산성(山城)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함양은 덕유산군이 긴 산줄기를 이어가면서 서쪽으로 전라도 장수와 경계를 이루고 덕유산군에서 갈라져 나온 금원산, 기백산 줄기는 경상도 거창과 경계를 이루고 한편으로는 지리산군이 남서쪽으로는 전라도 남원과, 남동쪽으로는 경상도 산청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 

함양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1,000m가 넘는 산이 20여 개나 되는데 대부분이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리산(智異山)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가(佛家)에서 깨달음을 얻는 큰스님의 처소라는 뜻의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고 신라 5악 중 남악(南岳)에 해당됩니다. 백두산의 정기가 지리산까지 흘러 내려왔다고 두류산(頭流山)으로도 불리는데, 지리산의 너른 품은 경남의 함양, 산청, 하동,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고을을 품고 있으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지리산 줄기는 45km, 그 둘레는 700km에 이릅니다.
  
덕유산(德裕山)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에 걸쳐있으며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해발 1,300m 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을 향해 30여㎞에 뻗쳐있고 향적봉에서 중봉, 무룡산(1,491),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1,507m)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만 해도 20㎞를 넘습니다. 
  
백운산(白雲山)은 지리산 고리봉(1,305m)에서 뻗어온 백두대간이 1,000m대 이하로 고도를 낮추어 수정봉, 여원재를 거치고 고남산, 봉화산, 월경산을 지나 함양과 장수 사이에서 다시 1,000m대를 넘어서는 최초의 봉우리로 산정에서의 조망이 일품입니다. 남쪽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하늘금이 연출하는 지리산의 파노라마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넉넉한 덕유산이 태평스레 앉아 있으며 그 너머에 황석산, 거망산, 월봉산의 산줄기와 금원산, 기백산의 산줄기도 가까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 황매산이 아스라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갓걸이산[掛冠山]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할미봉은 함양군 서상면을 지나 전북 장계면으로 넘어가는 육십령 고개 바로 북쪽에 솟아 있는 암봉으로 전북 쪽에서 육십령 고개를 향하여 도로에서 바라보는 기암괴봉의 운치가 일품입니다.   월봉산은 남덕유산에서 남령을 넘어 거망산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초입에 봉긋 솟아오른 봉우리로, 암봉과 육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진달래 군락지는 마치 지리산의 세석평전의 철쭉지대를 연상시키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거망산(擧網山)은 덕유산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줄기가 둘로 나뉘어져, 하나는 지리산으로 향하고 또 다른 능선은 월봉산을 거쳐 거망산을 지나 황석산에서 그 흐름을 멈추게 되는데, 거망산은 군내에 있는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 중 막내로서 황석산으로 이르는 능선길에 펼쳐진 억새밭은 장관을 이루며 이곳에서는 덕유산과 지리산의 연봉이 선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6.25때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이 활약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황석산(黃石山)은 백두대간 상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기맥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인 기백산, 금원산, 그리고 거망산, 황석산 가운데 가장 끝자락에 흡사 비수처럼 솟구친 봉우리로,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며 가을철에는 거망산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억새밭이 장관이고 산 정상부에는 황석산성이 있습니다. 
  
기백산(箕白山)은 함양과 거창의 경계를 이루는데, 달리 지우산이라고도 하며 용추계곡을 품고 있어 크고 작은 암반과 소(沼)가 많을 뿐만 아니라 수량도 풍부하여 용추폭포 등 아름다운 경관이 계곡 곳곳에 펼쳐져 있고 유서 깊은 용추사도 기백산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금원산(金猿山)은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위천면의 경계를 이루며 남덕유산에서 남동쪽으로 가지 친 월봉산 능선은 두 가닥으로 갈라지는데 그 중에 오른편의 수망령 쪽 능선 최고봉이 금원산으로 옛날에 이 산에 살고 있던 금빛 원숭이를 원암(猿岩)이라는 바위에 잡아 가두었다는 전설에서 산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오봉산(五峰山)은 함양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산으로 항상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서리 산, 또는 상산이라고 하며, 남원 쪽에서 바라보면 봉우리가 5개라고 하여 오봉산이라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특히 북쪽에서 보면 연비산과 옥녀봉 사이로 보이는 상산은 흡사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축소시켜 놓은 듯 찌를 듯 솟아오른 눈썹바위, 장수바위, 숨은벽 등 칼날 연봉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삼봉산(三峰山)은 지리산 북쪽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삼봉산 남쪽에는 옛날 가야 구형왕이 거주하면서 무기를 만들던 빈 대궐터(일명 빈대굴)가 있고, 등구마을은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봉산은 전에는 괘관산으로 불렀는데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백운산의 동쪽으로 형성된 산줄기 상에 있으며 지금은 함양의 뒷산으로 불리고 있는데, 옛날 빨치산의 활동거점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조정래 님의 소설 <태백산맥>에도 빨치산의 이동경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에서는 덕유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의 연봉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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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 국경으로 산성도 많아 
  
함양은 산이 높고 지정학적으로 국경에 해당되어 예로부터 산성(山城)도 많습니다. 황석산성(黃石山城)은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하나의 계곡을 감싸면서 형성된 포곡식 산성인데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라도의 장수, 진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 구조로 보아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대결하게 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성으로 성곽의 총 연장은 2.75km입니다.  
  
조선태종 10년(1410)에 경상도의 6개의 성을 수축할 때 화왕산성(火旺山城), 조혜산성(鳥惠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염산성(簾山城), 부산성(富山城)과 함께 수축한 기록이 있고 성내의 넓이는 34결이나 되었다고 하며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8월에 이르러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수축과 수성의 명을 받고 안음, 거창, 함양의 3읍 주민을 동원하여 성을 보수한 바 있습니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에는 이곳에서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와 안의현감 곽준(郭䞭) 등이 왜적과 격전을 벌였으나 그 해 8월 산성이 함락되어 500여 명이 순국한 곳으로 안의, 서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함락되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고 합니다.
  
산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이 섞여 있는데 석축 부분은 자연암반이 노출된 산 위이며 토석혼축(土石混築)은 일반 능선부분으로 성문은 동, 서, 남, 북동쪽에 나무로 문루(門樓)를 갖춘 작은 것이 배치되었고 성안 동쪽에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방지산성(芳池山城)은 서상면 소재지에서 방지교를 건너 충혼탑이 있는 방지산의 9부 능선상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군량미 비축을 목적으로 성을 축조했다고 해서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앞산 봉우리가 연못에 떠 있는 연꽃 같다하여 ‘꽃다운 못’ 즉 방지(芳池)라 하였다 합니다.  
현재 이 성의 성벽은 상단부가 무너져 성의 윤곽을 확인하기가 거의 어려우나 45x30cm 크기의 자연석과 활석으로 높이 3~4m 정도로 축조했고, 남아 있는 석축은 약 500m 정도에 불과하며 성 중앙에는 100x25cm 크기의 활석으로 쌓은 우물이 있고 북쪽 최정상부에 높이 2m, 폭 3m 정도의 원형으로 된 소형의 봉수대와 같은 시설이 있으며 또한 성 내부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근산성(沙斤山城)은 수동면 소재지의 뒷편 연화산(蓮花山)에 있으며 이곳은 함양군의 관문이며 서부경남에서 호남지방으로 가는 길목으로 원래는 사근역원(沙斤驛院) 자리였는데 거창, 산청 사이의 국도변에 위치하며 국도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수동 앞을 남쪽으로 흐르는 이 하천은 진주의 남강으로 흘러가는 경호강의 지류로서 사근산성은 함양의 외성(外城)격인 동시에 남북 관통로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삼국시대의 함양은 위치로 보아 신라, 백제의 접경이 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양국의 분쟁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축의 둘레는 2,796척이고 성 안에는 세 개의 연못과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형태는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말 경신년(1380)에 감무(監武) 장군철(張群哲)이 왜적에게 성을 빼앗긴 후 돌보지 않았다가 조선 성종 때 다시 수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함양읍지(咸陽邑誌)>에 의하면 이 성을 무찌른 왜적이 단숨에 함양을 공략하고 호남으로 쳐들어가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에게 섬멸되었다고 하는데, 따라서 이 지역은 신라, 백제의 국경분쟁과 왜구의 침략으로 시달리던 곳이었던 만큼 이 성이 요충지로서의 매우 중요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복원을 위하여 성을 실측 조사한 결과 둘레는 총 1,218m로서 석축의 잔존부는 편평 자연석 또는 가공석의 정연한 어금쌓기로 되어 있으며, 그 축조 상태는 매우 견고하고 높이는 4m 정도의 본래 성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마안산성(馬鞍山城)은 지곡면 창평리에 위치한 마안산(해발 507.8m)의 정상부에 가까운 9부 능선 상에 있는 산성으로, 축조연대 및 유래는 알 수 없으며 현재 부분적으로 흔적이 남아 있으나 거의 붕괴된 상태인데 양호하게 남아 있는 남벽은 40x20cm 크기의 자연석으로 축성하였으며 성벽은 높이 2m, 길이 약 50m 정도이고 폭 2m의 서문지가 남아있습니다.
  
팔령산성(八嶺山城)은 함양군과 남원시의 경계지역에 있는 팔령치(八嶺峙)에 위치한 산의 9부 능선 상에 위치한 퇴뫼식 산성으로 신라시대에 석축한 성으로 추정되며 현재 성벽이 거의 무너져 있으나 서북쪽 성벽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60x15cm 정도의 자연석과 인공석으로 벽돌쌓기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북동쪽은 경사가 심한 편이나 남서쪽은 비교적 완만해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서쪽에는 성 밖에서 안으로 오목하게 쌓아올린 서문지가 있으며 성의 둘레는 약 500m이고 넓이는 약 2,000여 평에 이릅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으며 또한 고려 말과 임진왜란 때 왜병이 사근산성을 함락시키고 운봉으로 진격하는 것을 이곳에서 맞아 싸웠으나 함락되어 전원 옥쇄하는 등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화려한 함양의 계곡들 
  
함양의 물줄기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화림동(花林洞)계곡을 지나 안의 읍치구역에서 금천을 이루며 남계천(南溪川)으로 흘러가는 물줄기와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함곡관을 지나 뇌계를 이루고 함양 읍치구역에서 위천(渭川)이 되는 물줄기와 지리산계곡을 흘러 내려와 임천(臨川)을 지나 엄천(嚴川)을 이루는 물줄기가 산청과의 경계지역인 생초면에서 합수하여 경호강(鏡湖江)을 이루어 마침내 진주 남강(南江)으로 유입되는데 경호강과 그 지류 주변에는 임수(林藪, 마을숲)가 마을과 가까운 하천변에 발달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곳이 상림입니다.
  
칠선계곡(추성계곡)은 지리산의 계곡들 중에서도 백미인데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며,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고 천왕봉 정상까지 18km에 걸쳐 7개의 폭포(瀑布)와 33개의 소(沼)가 있습니다. 
  
한신계곡은 지리산 북부의 있으며 백무동에서 세석평전까지 10km의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계곡미가 일품으로 ‘깊고 넓은 계곡’이라는 의미와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낀다 해서 한신계곡이라 부릅니다. 또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몰죽음을 당했다고 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사연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계곡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화림동계곡은 해발 1,508m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남강의 상류)이 서상과 서하를 흘러내리면서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潭)과 소(沼)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위로 흐르는 옥류(玉流)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그 길이가 무려 60리에 이르며 가히 우리나라의 정자문화의 메카라고 불리어지는 곳답게 계곡 전체의 넓은 암반 위에 수많은 정자들과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곳입니다.
  
용추계곡은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深眞洞)'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용추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유학자 돈암 정지영이 노닐던 곳에 그 후손들이 고종 3년 (1806년)에 세운 심원정이 수수하고 고풍스런 멋을 뽐내고 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신라 소지왕 9년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장수사(長水寺)가 한국전쟁 때 전각은 소실되고 일주문만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선비의 고을답게 정자가 70여 채 
  
함양은 선비의 고을답게 정자가 70여 채나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도 화림동계곡의 유서 깊은 정자들이 그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동호정(東湖亭)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蒙塵)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하고 1936년에 중수한 정자로서 남강천 담소(潭沼) 중의 하나인 옥녀담 옆에 있으며 화림동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합니다. 계곡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 등 수백 평의 널찍한 암반이 있어 이 곳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짐작케 합니다. 
  
군자정(君子亭)은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 선생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택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하였으며 정자가 있는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선생이 처가에 들릴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에서 노닐었다고 합니다.
  
거연정(居然亭)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 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최초로 건립하였으며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자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건립하였고 1901년에 중수하였습니다.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진주대첩(晋州大捷) 때 전사한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머물면서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고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곳입니다. 수많은 반석들이 널려져 있고 이러한 너럭바위 사이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흐르는데,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의 풍류에 대한 면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최근 화재로 소실되어 아름다운 정자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학사루(學士樓)는 함양의 읍치구역 안에 있던 정자로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 때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은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하므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학사루 서쪽에 객사(客舍)가 있었고, 지방관리가 정무를 보면서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심신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림(士林)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의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柳子光)의 시판(詩板)을 철거토록 하자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 곳이기도 합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조선 숙종 18년 (1692)에 군수 정무(鄭務)가 중수한 기록이 보이며 1910년 이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함양초등학교의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던 것을 서기 197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 목조와가(木造瓦家)입니다. 
  
학사루에 있는 느티나무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 현감으로 재임(1471∼1475)할 때 객사가 있었던 학사루 앞에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로서 수령은 약 1,0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21m, 가슴높이의 나무둘레가 9m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년 이상 된 나무가 60여 그루 있는데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받고 있으며 그 중 25그루가 느티나무로 이 느티나무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함양 상림(上林)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고 있는 위천가에 자리 잡은 호안림(護岸林)이며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에 조성한 숲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이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심해서 최치원 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지금 남아 있는 숲을 조성하였습니다.
  
당시 이 숲을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그 후 중간 부분은 파괴되고 위 아래로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습니다. 하림 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 있고 총 면적이 약 21ha나 되며 숲의 길이는 1.6km에 달하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人工林)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림에는 120여 종 20,000그루의 낙엽, 활엽수가 어우러져 있으며 이은리 석불, 함화루,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척화비 그리고 사운정, 초선정 등 정자와 만세기념비, 독립투사들의 기념비가 있어 상림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광풍루(光風樓)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인 금호강변에 우뚝 서 있으며 조선 태종12년(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현감 전우(全遇)가 창건하여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는데 그후 조선 세종7년(1425) 김홍의(金洪毅)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조선 성종25년(1494)에 안의현감(縣監)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선조34년(1601)에 안의현감 심종침이 복원하였고, 조선 숙종9년(1683)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는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향교와 서원이 즐비   함양은 선비의 고을답게 관학(官學)인 향교(鄕校)는 함양과 안의의 읍치구역에 남아 있고 사학(私學)인 서원(書院)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함양향교는 창건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경학(經學)을 공부시키는 소소당(昭昭堂)이 지금의 함양향교가 된 것으로 보이며 덕곡 조승숙(趙承肅) 선생의 명륜당 문기(文記)에 의하면 조선 태종의 문묘 창설 당시인 태조 7년(1398)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건물배치 형식은 경사지에 일축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직렬형 배치를 하였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축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축이 꺾어져 있으며 대성전에는 중국 5성(五聖)과 우리나라의 18현(東國18賢)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후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동재(東齋), 서재(西齋)와 문루(門樓)를 건립하였으며 건물 구성은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태극루, 전사제기고(典祀祭器庫) 등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의향교는 조선 성종 4년(1473)에 현감 최영(崔瑩)이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 12년(1736)에 다시 짓고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하였습니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이러한 배치는 평지인 경우에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하는 일반적인 향교의 배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이에 대성전의 기단을 높게 축조하고 다른 건물보다 층고를 높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유재란(1579) 때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12년(1736)에 중건하였고 건물 구성은 대성전(大成殿),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화우재(化雨齋), 출곡재(出谷齋), 재천루(在川樓), 제기고(祭器庫) 등으로 되어있으며, 배향 공간에는 동, 서 양무가 없고 대성전만 배치하였으며, 중국의 5성(五聖)과 우리나라의 18현(東國18賢)을 모시고 있습니다. 강학 공간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전면 좌우에 동, 서 양재가 안으로 좁혀지도록 배치되어 좁고 깊은 마당을 이루고 있으며, 명륜당 동쪽 측면에 제기고가 있습니다.  
  
남계서원(南溪書院)은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명종7년(1552)년에 개암 강익(姜翼)이 창건하였으며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숙종 3년(1677)에 문간공 정온(鄭蘊)을, 숙종 15년(1689)에는 강익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또, 별사(別祠)에 뇌계 유호인(兪好仁)과 송난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고종 5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별사는 훼철되었습니다.    용문서원(龍門書院)은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이 안의현감 5년간에 학교를 일으키고 인정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성종25년(1494)에 세웠습니다.
  
당주서원(溏洲書院)은 문효공 노진(盧禛)의 사당으로 선조14년(1581)에 창건하고 현종 원년(1660)에 사액(賜額)하였으며 별사에는 당곡 정희보(鄭希輔)를 배향하였는데 고종5년(1868)에 철폐되었고 지금은 그 터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글을 지은 유허비만 서 있습니다.
  
백연서원(栢淵書院)은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사당으로 현종 11년(1670)에 건립하였다가 고종5년(1868)에 철거되었습니다.
  
도곡서원(道谷書院)은 덕곡 조승숙(趙承肅), 죽당 정복주(鄭復周), 송제 노숙동(盧叔仝), 신고당 노우명(盧友明), 홍와 노사예(盧士豫), 춘수당 정수민(鄭秀民)을 배향하였으며 숙종 27년(1701)에 세웠고 고종5년(1868)에 철거되었습니다.  
  
구천서원(龜川書院)은  춘당 박맹지(朴孟智), 남계 표연말(表沿沫), 일로당 양관(梁灌), 금재 강한(姜漢), 구졸암 양희(梁喜), 우계 하맹보(河孟寶)를 배향하였으며 숙종27년(1701)에 창건하여 고종5년(1868)에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후손들이 제실과 비를 유허지에 세우고 예를 드리고 있으며 1984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정산서원(井山書院)은 간숙공 허주(許周), 문정공 허목(許穆), 돈남 허방우(許方佑), 삼원 허원식(許元식)을 배향하였습니다.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조선 성종5년 현감을 지낸 회헌 임대동(林大仝)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청계서원(靑溪書院)은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의 사당으로 1921년에 옛 청계정사(靑溪精舍)의 터에 세웠습니다.  
  
선비들의 고택 
  
함양의 일두고택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3,000여 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입니다. 솟을대문에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서 바로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동북으로 비스듬히 가면 사랑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 등을 써 붙인 사랑채는 전퇴가 있으며 높직한 댓돌 위에 세워져 있고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 안채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다시 중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남향한 일자형(一字形)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한데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으로는 가묘(家廟)와 별당, 그리고 안 사랑채가 따로 있습니다. 옛 손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일두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며, 일두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고 부릅니다.  
  
안의의 허삼둘 가옥은 당시 진양갑부 허씨 문중의 허삼둘이 토호 윤대홍에게 시집와 지은 집으로 특히 안채의 구성에서 특출함을 보이는 가옥으로, 당시의 시대상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여성 중심의 공간배치와 부엌으로 출입하는 통로가 전퇴를 열고 토상화(土床化)한 것이 특이하며 ‘ㄱ’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부엌에 들어서면 거의 오방형의 넓이인데 꺾인 부분이 모서리가 죽어 일그러져 있고 중간에 기둥 둘만이 서 있어 넓어 보이며 사랑채는 평면이 ‘ㄱ자형’인데 정면 7칸으로 구성되었고 동향을 하였는데 그 남단 칸은 방으로 되어 있고 전퇴가 있으며 누각을 세우듯 높이 설치하였고 난간을 둘렀습니다. 그 외에 안채, 사랑채, 바깥 행랑채, 안 행랑채, 대문간채, 곡간채가 일곽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