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모든것

황석산성 피바위 전설

대봉산 2016. 6. 27. 13:56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5년간이나 계속 되었다.

1597년 정유년에 재차 침략을 해, 왜병은 남해안으로  상륙 곽재우 장군의 요새인 창령 화왕산성을 돌아

초계와 합천을 거쳐   전주와 남원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올라오면서 함양 황선산성으로 쳐들어 왔다.


당시 제찰사로 있던 이원익은 안의 ,거창, 함양 등 3개 읍의 백성들과 군사를 모아 황석산성을 지켰다.

그 당시 안음 현감으로 있던 곽준은 함양 군수 조종도와 힘을 합세 목숨을 걸고 싸울것을 결의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해부사 백사림도 가담하여 힘을 모았다.

왜적은 호남진출의 장애물인 황석산성을 사수한다는 작전을 세우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니베시마 마사시게 등의

장수들을 선봉장으로 직접 공격일선에 나섰다.  아군의 진지 역시 튼튼하게 방비되어 있었다.

관군과 의병은 말할 것도 없고 뜻을 같이하고자 모여든 남녀노소의 백성들은 모두가 살아서 적의 호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비장한 가옥을 다짐했다.

왜적은 조그마한 산성하나 함락시키지 못해 시일만 끌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수치요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전 병력을 투입시켜 일시에 치열한 공격으로 밀어붙였다. 이에 겁을 먹은 김해부사 백사림은 도별장이라는 장수의 직분도 잊어버린채

자기만 살겠다고 몰래 가족들을 이끌고 북분을 열고 달아나고 말았다. 열린 북문을 열고 왜적들은 물밀듯이 쳐들어옴으로서 성안은 아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성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황석산성 성내에는 장정들의 식사를 맡아 일하던 옥녀라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옥녀는 지원해서 성내에 들어와서 왜군과 싸워 원수를 갚기로 맹서한 여인이었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남부럽지 않게 부모 슬하에서 자라왔고, 부모님의 정혼으로 이웃마을로 출가하게 되었다.

달콤한 신혼생활의 꿈에서 채 깨기도 전에 왜란이 일어났다.

그녀의 남편은 국난의 위기를 구출하고자 의병으로 지원하여 왜적과의 싸움에서 그릐 남편은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옥녀의 슬픔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슬퍼만 하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아들을 잃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왜적이 정우년에 재침하자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진하여 성내로 들어 온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죽을 수 있는 마음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성안에서 살육전이 벌어지자 관민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 밖에 없었고

옥녀도 나라의 원수고 남편의 원수인 왜병을 한명이라도 죽여야 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성내에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아수라장 속에서 

다가오는 왜병을 향해 부엌칼로 가슴 한 복판을 있는 힘을 다해 찔렀다. 다른 부녀자들은 돌을 던지고 낫으로 혹은 칼, 몽둥이나 죽창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들고 적에게 맞섰다. 왜병들이 칼을 빼어들고  달려 오고 있었다. 옥녀부인은 적에게 수치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했다. 그녀는 왜병이 가까이 오기 전에 서편 성벽으로 달려가서 벼랑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아녀자들도

줄줄이 뒤따라 벼랑으로 뛰어 내렸다.많은 아녀자들의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벼랑

아래의 핏자국은 보는 사람들로 마음을 한없이 울적하게 한다. 이렇게 처절하게 피로 물든 바위를 후세 사람들은 피바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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