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지곡공원에 2개의 시비가 있다.
노진의 "만수산가"와 선조임금의 "어제가"이다.
노진이 선조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만수산가"라는 권주가를 지어 올렸고,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다시 외직으로 나갈때,
선조임금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노진에게 "어제가"를 읊어 주면서 아쉬워 했다.
만수산가 -노진-
만수산 만수봉에 만수정이 있더이다
그물로 술빚으니 만수주라 하더이다
이 한잔 드시오면 만수무강 하시리다
어제가 -선조임금-
오면 가려하고 가면 아니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날이 전혀없네
오늘도 가노라하니 그를 슬퍼하노라
개평에 두 인물인 하동정씨 일두 정여창(1450~1504)과 문효공 옥계 노진(1518~1578)이 배출된 곳이다.
이 두분은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
정여창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이면서 성리학자다,
그는 이기론과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그는 사화에 연루돼 유배가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김굉필,조광조,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노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박자,전적,예조,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는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형조 참의를 거쳐 도승지,진주목사,충청도 관찰사, 부제학 등를 역임했다
선조 8년(1575)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사퇴한 후에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임명 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효로 정여(旌閭)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 됐으며 저서로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있다
양 가문이 당대를 풍미했으나 당시의 정치판도에서 보이는 성격은 조금 다르다.
하동정씨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일괄적인 흐름을 보이는 반면, 풍천노씨는 ‘남인’의 성격을 주로 가지면서 서인이 상당수 포함됐다.
다시 말해 하동정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단단히 만들었고, 풍천노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결국 풍천노씨가 하동정씨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의미다. 이런 차이는 양 문중의 중앙 정계 진출은 물론 개평마을에서의 활동 영역에서도 은연 중 엿보인다.우선 하동정씨 문중이 풍천노씨보다 건축 활동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하동정씨 문중의 대지 규모는 풍천노씨보다 월등히 넓다. 이는 하동정씨가 마을 내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풍천노씨는 이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주도 세력에게 밀린 결과다.
이는 두 문중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하동정씨 문중은 위엄이 있으며,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종파·종손 중심적’이다. 반면 풍천노씨 문중은 상대적으로 ‘지파·지손중심적’이다. 풍천노씨 씨족들이 개평마을과 떨어진 곳에 많이 분가했다는 이야기다.
●부락제조차 따로 지낸 반상의 서열
개평마을이 남다른 전통마을이라는 것은 신분별·문중별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반가 주거지는 마을의 길이 방향으로 중앙부분에 기다란 영역을 이루면서 평민 공동영역과 명백하게 구분된다. 이와 동시에 두 문중의 공동장소도 서로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하동정씨 가문의 경우 도곡서원·대종가·만귀정 등이 이 문중 선산인 ‘숭안산’을 향하는 축을 형성하고, 풍천노씨는 대종가·동산정사 등이 주요선산인 ‘주곡선산’을 향해 축을 이룬다. 평민 주거지는 북쪽으로 ‘덕암들’과 마을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마을초입부터 ‘옥계천’을 따르는 주변에 형성됐다. 또 마을초입의 ‘정자나무’와 동제 장소인 ‘신선대’, 마을 중간 부분에 위치한 ‘우물’도 평민용이다. 현재도 이들이 거주했던 집들이 개울 언저리에 허물어진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양반과 평민의 위계는 마을 부락제에서도 나타난다.
개평마을 부락제는 섣달 그믐날부터 마을 주민들이 농악과 풍물을 보이며 가가호호 방문해 쌀을 조금씩 추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정월 보름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선정된 제관 3명이 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나무와 신선대, 종암 우물 주위 등 세 곳에서 동시에 당산제를 올린다. 당산제 3일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궂은 것을 보지 않고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며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그런데 당산제에 참가한 사람은 평민뿐이다. 양반들은 마을 내부에 그들만의 공동장소 즉 문중의 ‘대종가’가 있으므로 굳이 부락제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대종가의 사랑대청에 남자들이 모여 공동 관심사를 협의했고, 여성들도 안채에서 상호교류를 했다. 물론 마을에 있는 ‘정사’와 ‘서원’도 양반들의 활동장소였다. 마을에서 함께 살지만 부락제조차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대의 양반과 평민의 위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예다.
참고문헌:
『함양지곡면 개평리 문화마을 지표조사보고서』,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mystery123@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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