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아스피린의 유래
인류가 사용해 온 약중에서 가장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약이 뭘까요?
바로 아스피린이죠. 정식 화학명은 아세틸살리실산.. 오늘날 연간 5만톤정도가 팔려나간다고 하는데(하루 약 1억알이 소비된다고 함),우리나라에서도 보통 20억원 이상의 아스피린이 팔리고 있대요. 이 아스피린은 고대 희랍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버드나무껍질을 산모의 통증을 줄이고 열을 내리는데 사용한 데서 유래 되었어요. 그후 2천년이 훨씬 지나 버드나무껍질의 약효의 주성분인 살리신을 분리해서 몇단계의 화학반응을 거쳐 아스피린의 모체인 살리실산을 얻어낸거죠.
독일 바일엘사의 펠릭스 호프만이라는 연구원이 류마티즘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위해 만든약이 바이엘 아스피린의 탄생이죠. 1899년엔 분말형태였지만 1915년 이후부터 알약형태로 시판되기 시작했답니다. 오늘날 아스피린은 단순한 진통제가 아니죠. 심장병, 뇌졸중,임신부작용,고혈압, 식도암, 대장암,직장암, 백내장 예방등 그야말로 헤아릴수 없는 효능을 발휘하잖아요. 그러나 모든 약은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는법, 가장 흔히 나타나는 아스피린의 부작용 증세로는 위장출혈과 지혈작용 방해고, 그래서 수술을 앞둔 환자는 절대 복용을 삼가해야 한답니다.그리고 아스피린을 복용을 하실때는 가급적이면 식후 30분이내로 복용하는 것이 좋답니다.
버드나무추출물(내츄럴 살리실산)->살리실산(bha)->아스피린
자료출처 : 고려대학교 화학과 진정일교수(동아일보 96.3.28)
옛날에 우물을 파면 젤 먼저 버드나무를 우물가 주변에 심었는데 왜 일까요?
버드나무 뿌리는 물을 깨끗이 정화 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버드나무 종류들은 물속의 질소와 인을 흡수하여 물을 깨끗하게 해 주는 수질 정화능력이 있으며, 카드뮴 등 중금속을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니 옛날 사람들은 물을 길러 밥을 짓고 빨래하는 우물가에 버드나무 심었겠죠? 그래서인지 우물가를 중심으로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려를 세운 태조왕건과 유화부인의 이야기,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의 둘째부인 강씨.. 두분은 모두 목마른 나그네에게 버들잎을 띄워 물 한바가지 준 인연으로 왕의 부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유화부인과 강씨 부인이 바가지에 물을 떠 줄때 버드나무 잎을 몇잎 띄웠을까요?
세잎,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삼을 좋아하고, 서양사람들은 7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잎을 띄었답니다.
버드나무가 심겨진 우물가에 목마른 나그네가 찾아오 듯 물가에 자라는 버드나무 또한 물 속 생물들이 많이 찾아오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나무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버들 밑에서 노는 물고기란 뜻으로 버들치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있습니다. 버들치는 우리나라 민물고기 중 4번째로 많은 종인데 깨끗한 1급수에서 서식하는 깨알같은 점박이 무늬를 가진 작은 물고기입니다. 또 대나무와 소나무를 좋아하였던 유교 선비들은 버드나무를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물 옆에다가 심어 놓으면 아무 데서나 쉽게 자라고, 잘 휘어지기까지 한다고, 지조가 없다고 보았고, 습성이 항상 물 가까운 쪽으로 가지를 잘 뻗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쫒는 속물에 비유되는 나무이기도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풍류객들의 시화에 등장하는 좋은 소재로 쓰여지기도 했지요.
버드나무는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암수 딴그루입니다.
솜털이 붙어 있는 씨앗이 호흡기 질환을 유발한다고 한때는 이 나무를 많이 베어 낸 사례가 있었죠.
꽃가루가 아닌 씨앗이므로 알레르기를 일이키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뿌리가 물을 정화하는 작용이 있어 예로부터 연못가나 우물가에 많이 심었는데,현대와 와서는 오염물질을 흡착하여 대기를 깨끗이 하는 정화 능력이 높아서 가로수와 정원수로 많이 이용합니다. 버들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왕버들,산버들,갯버들, 호랑버들, 용버들,키버들,수양버들 능수버들..등
왕버들을 한문으로 鬼柳 라고 하는데, 목재안에 인성분이 있어서 비오는 날 밤에 빛을 내어 귀신불(도깨비불)또는 귀신나무라고도 했습니다.
언젠가 신문 보도를 보니까 주왕산 주산지(注山池)의 명물인 삼백 살 왕버들이 말라죽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죠. 물속에서도 살 수 있는 나무가 왕버들이라고 하지만, 1년에 최소한 서너 달 이상은 물에 잠기지 않아야만 생육에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산버들에 얽힌 기생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
430년전 홍랑과 최경창은 지극한 사랑을 합니다.
최경창(1539~1583)은 전라도 영암출신으로 시와 시화에도 뛰어 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고 합니다.
선조때 삼당시인(최경창, 백광훈, 이달)중의 한명이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등과 함께 8문장가로 불리웠습니다.
1573년 (선조5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하면서 홍랑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관리들이 부임하면 관청소속의 기생들을 소집점검합니다.이때 관리들과 기생들의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점고하고 하죠.
홍랑과 최경창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술과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알아본 최경창과 홍랑은 사랑에 빠지게 되죠.
그러나 기생과 관리와의 사랑은 언제나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지요.
임기가 끝나면 자연적으로 이별이 되는것입니다.
특히 함경도와 평안도 변방의 군사요충지는 이 지역주민들조차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었고,
결혼도 타지역과 하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관청소속 기생들은 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겠죠.
최경창이 임기가 끝나 경성을 떠날때 홍랑은 함경도 함흥까지 따라와 이별을 고하고, 또 송별시를 써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묏버들가지 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간밤 봄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라는 시에
고죽(최경창의 호)은 다음과 같은시로 화답을 했다고 합니다.
"옥같은 뺨에 두줄기 눈물 흘리며 한양을 떠나는데
새벽 꾀꼬리 한없이 우는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비단적삼에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풀빛 아스라이 홀로가는것을 전송하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난초)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나는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이후 1575년에 최경창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밤낮으로 걷고 걸어 7일만에 서울에 도착해서 최경창과 재회를 하고 함께하지만
붕당이 심했던 당시에 명종비 인순왕후 국상과 북방지역 사람의 도성 출입을 두고
사헌부에 탄핵을 받아 1576년 파직되고 맙니다.
그후 최경창은 변방 지역을 전전했고, 1583년 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 오던중 객사합니다(불과 나이 45세)
홍랑은 최경창 무덤에서 시묘3년을 살며 무덤을 지켰고, 얼굴을 훼손시켜 뭇 남성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자 최경창의 시와 유품을 모아 정리하여 해주최씨 가문에 전달하고
자신은 고향(함경도 홍원)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쳤다.
당대의 문장가 최경창과 동거 기간은 불과 6개월 남짓이었지만,
한 남자를 헌신적으로 사랑 하였던 홍랑
살아서는 천민이었지만 죽어서 양반이 된 사람은 평양기생 홍랑뿐이다.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묻히고, 기생으로 유일하게 사대부족보까지 올라간 사람이 바로 홍랑입니다.
최경창과의 애톳한 사랑이 해주 최씨의 문중까지 감동을 시켰기 때문에,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그녀의 무덤이 있습니다.(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위치한 해주최시 문중산)
◆수나라(581~618)
수나라 문제가 휴량과 진을 멸망 시켜 합하고, 중국을 통일시킵니다.
문제가 죽고 둘째아들 양제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궁전을 짓는 공사를 진행하게 되죠.
매월 약 2백만명의 인부가 동원 되어궁전건축공사 및 남북을 잇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하면서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는데,백성들이 제방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은것을 기뻐하며, 자신의 성인 양(楊)을 붙여 양유(楊柳)라고 이름을 하사 한데서 수양이라는 유래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또 중국의 수양산 근처에 많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고요.수나라 양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이 2대 공사에 끌려 나온 백성의 수는 헤아릴수 없이 많았고,뿐만 아니라 양제는 자신이 탈 용선, 유람선 등 배 수만척을 만들고, 큰호수도 만들고, 호수 가운데 여러개의 산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공사장에는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백성들은 일부러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면서까지 부역에 나가지 않을려고 했답니다.가혹한 부역에 나가서 죽는것 보다 차라리 불구가 나았기 때문입니다.또 만리장성 공사장에는 열흘동안 1백만명의 인부가 동원 되었는데, 그중 반 이상이 부역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합니다.그리고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다 떨어지면 궁전안 나무에 색비단으로 꽃과 나뭇잎을 만들어 달게 했고, 연못에는 색비단으로 연잎과 연꽃을 만들어 띄우도록 했답니다.비단으로 나뭇잎과 꽃을 만들기 위해 백성들의 옷을 거두어 갔고, 백성들은 양제의 사치와 허세에 굶주리고 헐벗어 원망이 대단했습니다.또 수나라 양제는 3차례동안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3차례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고구려 영양왕2년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이 때문에 수나라 국고가 파탄이 나죠.
결국 수나라는 양제의 지나치게 호화스럽고,사치스런 생활과 가혹한 토목공사와 무리한 고구려의 원정으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며,618년 장군 사마덕감과 우문화급이 구테타를 일으켜 양제를 목졸라 죽입니다. 그후 양제 손자인 양종도가 돌궐의 지원을 받아 희수를 건립했으나 630년에 당나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비록 수나라는 통일한지 36년만에 무너졌으나,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선 수나라는 율령의 핵심인 3성6부제,과거제의 시초가 만들어졌습니다.수문제와 수양제가 굴착한 운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 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수나라가 중국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이유는 후한의 멸망이후 370년 가까이 분열 되었던 중국 대륙을 통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수양버들과 능수버들,개수양버들의 차이
축축 늘어지는 버드나무에는 능수와 수양버들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능수는 어린가지가 황녹색이고 수양은 붉은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양버들은 수나라 황제 양제가 황하와 회수글 잇는 대운하를 건설할 당시 제방에 심게한 나무이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능수버들이고, 수양은 보기 힘들다
능수버들 : 한국 원산,어린가지가 황록색, 씨뱡과 포끝, 잎뒷면에 털이 있다
수양버들 : 중국 원산, 어린가지는 적갈색, 씨방,포끝,잎뒷면에 털이 거의 없다
개수양버들 : 어린가지는 황록색, 씨방, 포끝,잎뒷면에도 털이 없다.
◆한국에서는 옛부터 수양버들을 집안에 심지 않은 이유3가지
1.가지가 늘어진 수양버들의 모습이 상을 당하여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켜
집안에 심으면 불행한 일이 닥친다는 미신때문에
2.수양버들 실가지가 요염한 여자의 허리와 비슷하다고
3.버드나무가 바람에 잘 흔들려 집안에 심으면 부부 중 한사람이 바람을 피운다고 해서
버드나무를 가리키는 한자 '유(柳)'를 보면 나무 '목(木)'에다가 '묘(卯)'자가 붙어 있다. 묘(卯)는 왜 붙어 있는 것인가? 묘(卯)는 12지(支) 가운데 토끼를 상징하면서 계절적으로는 음력 2월을 가리킨다. 인(寅)·묘(卯)·진(辰)이 각각 음력 1월·2월·3월에 해당하면서 봄을 가리킨다. 묘는 그 가운데에 있으니 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드나무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나무입니다. 나무 가운데 봄을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인 셈이죠.
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 자신을 오류라고 칭하고 무위자연을 노래하며 평생을 사신 분이죠.
또 화류계 여인들을 노류장화에 빗대기도 했지요.
노류장화란 길가의 버들과 담벼락의 꽃이란 뜻으로 누구나 길을 가다 쉽에 꺾을수 있다는 꽃나무인데 이는 몸을 파는 여자를 가르키는 말.즉, 사내를 상대로 살아가는 여자를 흔히 화류라 칭했죠. "버들같이 가냘프고 아름다운 꽃" 여기에서 화류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평양기생 계월시
대동강 저문달이 고운님 보내올제
천만사 고이고이 늘어진 실버들은
가는잎 잡지 않고 휘놀기만 하느니
◆일본의 오노도후 이야기
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기 위해 수없이 노력하는것을 보고 노력의 중요성을 깨딸았다는 오노도후는 일본의 초등교과성에 실릴정도로 유명한 서예가입니다. 화투패의 그림을 그린 사람이기도 하죠. 화투의 비광을 보면 우산을 쓰고 개구리를 보고 있는 오노도후(小野道風. 894-967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서예가. 우리나라의 한석봉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이 사람도 한석봉처럼 글공부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서예 실력이 늘지않는걸 한탄하던 오노도후는 어느 비오는날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불어난 물에 개구리가 떠내려가는걸 봤는데, 개구리는 미끄러지면서도 버드나무 가지를 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그러다가 곧 휩쓸려가겠지- 생각했지만 개구리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 기어이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물에서 벗어난다.
그것을 본 오노도후도 깨달음을 얻고 열심을 다해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