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렙(공부합시다)

[스크랩] 개운 조사開雲祖師 2

대봉산 2012. 9. 14. 00:05

 

한국의 도인들

2천여 명 문도를 거느린

개운 조사開雲祖師

박정진(문화평론가, 문화인류학자)

선도의 문명사적 의미


인간의 꿈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영원한 삶에 관해서는 언제나 그 문 앞을 서성이는 순례자, 구도자의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지구상에 모든 고등종교의 꿈도 이름은 서로 달리 하지만 이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 생겨나는 모든 종교들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신선(神仙)과 관련된 옛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 신선에 도달하는 방법이 선도(仙道)라는 방법이고 선도는 그 본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고 변질되긴 했지만 손에 손을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선도라는 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원형으로서 매우 종합적이고 생활복합(문화복합)적인 문명체계라는 것이 통설이다. 말하자면 선도는 단순히 수도자의 수도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대 문화원형을 담은 그릇으로서 문명의 발달에 의한 각종 공해의 만연과 환경파괴로 몸살을 앓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지혜를 줄 전통임에 분명하다.
우선 선도가 일상의 속세를 떠나서 산의 토굴에 들어가 몇십 년간 수도를 하여 신선의 경지에 오르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버려야 한다. 선도는 바로 우리의 생활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고 잠시라도 손을 놓아서는 살 수 없는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숨은 일상의 모든 활동과 함께 따라다니며 리듬을 맞추는, ‘생활의 리듬 그 자체’인 것이다. 선도는 바로 이 숨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선도의 핵심은 바로 숨과 숨을 담고 있는, 몸과 몸을 담고 있는, 이 거대한 우주라는 세 가지 요소의 합일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 이 숨과 몸과 우주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숨이 몸을 만들고 몸이 숨에 영향을 주고 몸은 우주와 교통하면서 스스로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운동을 반복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흔히 성인(聖人)의 몸은 우주의 생성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들 삼자는 삼박자를 이루면서 하나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숨을 통해, 몸을 통해, 우주와 교감하면서 안심입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죽지 않을 수 없다면 죽음에 초연해질 수는 없는 것인가? 이른바 장생불사(長生不死)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은 삶과 언제나 빛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는데 장생(長生)은 또 무엇이고 불사(不死)란 무엇인가? 장생불사가 아니면 무병장수(無病長壽)라도 달성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정일 것이다.
이번 ‘한국의 도인들’은 바로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의 이름난 옛 도인들을 찾아 보는 기획물이다. 그 첫 번째로 개운 조사(開雲祖師·1790~?)를 싣기로 했다. 현재 직접 간접으로 그의 도를 전수받은 문도들은 줄잡아 2천여 명이 된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육조 혜능(六祖惠能)에서 이어지는 선종(禪宗)을 주류로 하고 있는 조계종에서 개운 조사를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앞에 나서서 특정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인도 불교의 가장 중국화된 형태인 선종(禪宗)은 중국 문화 전통의 ‘말(言)에 대한 집착을 통해 동시에 말을 극복하려는(無化시키려는) 이중적인 노력’의 맥락에서 완성된 수행체계이다. 그래서 중국에 이르러 종래의 선도의 숨(呼吸: 息)은 말(言: 話頭)로 대치되어 버렸다.
최치원이 유·불·선 삼교의 조화를 이루는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설파한 것도 몸공부·마음공부·기공부를 통합한 것이고 서산(西山) 대사가 ‘삼교회통(三敎回通)’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 삼자를 관통하여 자유자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불가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참선(參禪)의 방법이 가장 세련되고 보편적인 ‘도인(道人)이 되는 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도인의 길은 작은 자아를 버림으로서 더 큰 자아를 얻는 득도의 과정인 것이고 생성변화 그 자체야말로 더 큰 자아이며 광대무변한 즉자(卽自)의 세계인 것이다.
선종은 한마디로 화두참선(話頭參禪)을 수행의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불교종파인 셈이다. 그러나 실지로 참선을 할 때 호흡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호흡이 제대로 안되면 참선도 제대로 안될 것은 뻔하다.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면 참선은 반드시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숨은 화두와는 달리 몸과 직접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고 몸은 동시에 우주와 깊은 관계 속에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화두에 민감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화두에 둔한 수도자를 계속 화두에만 붙잡아 둔다면 분명 어떠한 정신적·신체적 불균형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두든 호흡이든 실은 그것을 잡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수도는 바로 마음과 몸과 우주의 삼위일체에서 이루어지는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화두는 결국 공(空)을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한 것(역설적으로 언어를 버리기 위해 언어를 쓴 것)이고 보면 결국 화두는 공(空)이 되고 마음은 결국 거꾸로 호흡(숨)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역시 숨이란 생명의 가장 일의적인 것이요, 자연과 교섭을 하는 경계에 있는 행위요, 그것에 의해 우리 몸은 살아가는 것이 된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주와 교감하면서 생사를 반복하는 존재이다.
개운 조사는 바로 현묘지도와 삼교회통을 가장 최근세사에서 실현한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인 것이다. 

 

회삼귀일의 중흥조 개운 조사


개운 조사의 이름은 지난 70~80년대까지만 해도 불가와 선가의 추종자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전해왔다. 그러다가 월간 『신시(神市)』(93년 4월호)에서 ‘지리산에 숨어 사는 204세 도인, 개운당 스님’으로 소개되었고 그 후 일간지인 『문화일보』에서 95년 5월 선맥을 다루는 특집 시리즈로 3회에 걸쳐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탈한 도인’이라는 제목으로 일대기를 소개했던 것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개운 조사가 생전에 주석한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環解刪補記)』(이하 『정본수능엄경』)에 따르면 그는 경북 상주 개운동(開雲洞)에서 아버지는 김씨, 어머니는 양씨로 태어났으며 부모의 태몽에 달 속에 하나의 둥근 태양 같은 금성을 끌어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태어나서 3살 때 아버지를,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상주읍의 외숙부에게 맡겨졌는데 7살 때 외숙부마저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는 외숙부의 상주노릇으로 3년상을 하였다. 이러한 부모와 외숙의 연이은 죽음으로 그는 어릴 때부터 죽음을 벗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스님을 만나 부처님이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보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다는 소식을 듣고 출가를 결심, 그의 나이 13살에 봉암사(鳳巖寺)로 출가하여 혜암 선사(慧庵禪師)의 시자가 된다. 그런데 한 해 뒤에 혜암 선사마저 또 입적을 했다. 결국 그와 만나는 사람은 몇 해를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반복된 셈이다.
1770년 그 후 6년간 환적암(幻寂庵)에서 머물다가 19살 되던 해에 다시 스승을 찾아 10여 년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다시 환적암으로 돌아온다. 고덕(古德) 스님의 “공연히 쇠신만 닳게 하면서 동서로 분주하게 다녔네.”라는 글귀에 홀연히 느낀 바가 있어서였다. 이때 그의 나이 30살. 그러나 스승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잠도 자지 않고 밥도 굶다가 공경히 절하면서 기원하기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도 중에 그는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정직만을 굳게 지키면서 계율을 청청하게 지키고 선정을 성실하게 닦았다.
이렇게 하기를 1년 남짓, 어떤 미친 스님이 비틀 걸음으로 들어오는데 몸의 형태는 수척하고 의복이 남루한 데다가 온몸에 짓무른 부스럼이 나서 그 냄새에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경히 절하고 맞이하여 시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건만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더러는 때리기도 하며 어떤 때는 희롱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정직만을 굳게 지키며 배나 더 공경할 뿐 한번도 의심하지 아니하였더니 어느 날 밤에 홀연히 불러서 말씀하기를,
“너는 무심한 사람이구나. 꾸짖어도 괴로워하지 않으며 때려도 성내지 않고 희롱해도 어하지 않으며 사랑해 주어도 기뻐하지 아니하니 마음을 항복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도를 증득할 것이니라. 여러 해 동안 부처님 앞에서 기원한 것이 무엇인고?”
“지극한 소원은 참다운 스승님을 만나 불법을 듣는 것이요 그 밖에 구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네 스승이 되면 어떻겠는고?”
이에 곧 슬픔과 기쁨이 한데 어울려 백 번 절하여 간절히 빌었더니
“인걸은 명당의 지역에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를 닦는 것도 그러하다.”
스승은 그를 데리고 희양산에 올라갔는데 달이 대낮처럼 밝고 눈 앞 경계가 통쾌하게 전개되었다. 큰 반석 위에 말끔한 집이 저절로 세워지고 때가 되면 음식이 저절로 내려왔다. 그는 이런 것을 보고서 신심이 백배나 솟구쳤다. 그는 스승과 함께 삼보 앞을 향하여 공경히 예배하고 큰 참회와 깊은 맹서를 했다.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는 것으로 시작과 끝마무리의 긴요함이 되나니 수행하는 사람들이 만에 하나도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아만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공부하기를 일주일만에 첫 번째 단계인 간혜지 누진통의 인을 증득하니 스승은 『정본수능엄경(正本首楞嚴經)』과 『유가심인록(瑜伽心印錄)』을 그에게 부촉해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보현 존사에게 구결(口訣)로 받은 것으로 믿고 알고 닦아 증득하는 일이 모두 여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소중하게 받들어 간수하라.”
이렇게 공부하기를 계속하다가 어느 날 스승은 이별을 고한 다음 홀연히 허공으로 날아가시니 깨끗한 집도 온데 간데 없었다.
이에 다시 백련암(白蓮庵)으로 내려와 금(金)을 연단(煉丹)하여 구슬을 얻고(煉金得珠: 수다원과) 심원사(尋源寺)에서 보임출태(保姙出胎: 사다함과)하고 유즙임경(乳汁林竟: 아나함과)하는 동안에 여가를 활용하여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의 원고를 초하여 끝내게 된다. 원고를 발행할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면벽(아라한과)이 더 급하기에 우선 보류하고 여러 마리의 용으로 하여금 교대하며 지켜 보호하게 하고 지리산 묘향대로 다시 떠난다. 이때 그가 떠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밀한 곳에서 남모르게 도를 닦아 증득한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의 모습이 신선의 풍채로 변하는 데다가 일마다 기적이 많은 것을 보고 양봉래(楊蓬萊: 이름은 士彦)가 출현했다고 하면서 사방 이웃에서 끊임없이 찾아들므로 오래도록 선정에 들기가 어려워 부득이 멀리 한적한 곳으로 떠난다. 떠날 무렵에 원고는 경전을 얹어놓은 시렁 천장 위에다가 깊이 간직해 놓고서 후세의 어진 이를 기다리며 바위 위에 몇 가지 흔적을 남겨서 그것을 보고 믿고 따르게 한다. 불성이나 도의 힘은 우주가 다 같은 것이나 그 닦아 증득하는 여하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니 힘써 정진해야 한다.”
개운 조사는 후에 문경 봉암사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고 환적대에서 불공삼장으로부터 『능엄경』의 진수를 받는다.
그가 말한 수도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 도를 닦는 데 가장 긴요한 일이 되는가 하면 성품이 움직이면 마음이니 그 이름이 마음심(魔音心)이고 마음이 고요하면 성품이니 그 이름이 성품성(聖品性)이다. 그러므로 성품을 따르는 자는 성인이 되고 마음을 따르는 자는 마구니가 되나니 후학들은 이를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항복받은 다음에라야 도들 닦을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면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련암에서 금단(金丹)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도가나 선가에서 말하는 금단을 불교에서 말하는 수다원과와 동일시한 내용이다. 원래 『능엄경』·『원각경』·『금강경』·『기신론』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 강원의 4교과로 쓰이는 중요한 경전으로 마음공부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경전이다.
이에 비해 『정본수능엄경』은 마음(慧와 性)을 항복받는 것(降伏其心)을 강조하면서도 『능엄경』에서 비밀로 덮어둔 몸(定과 命)공부에 대한 비밀을 어느 정도 밝혀놓고 있는 경전이다. 『정본수능엄경』은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보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가심인정본수능엄경』은 이르기를 ‘이 경전은 금강반야바라밀을 닦아 연마하는 총체적 비결이니 금강은 법의 이치요, 반야는 법의 실체요, 바라밀은 법의 작용이니 유위법과 무위법 그리고 처음도 되고 끝이 되는 현묘한 공이 비록 다 갖추어졌으나 눈밝은 사람이 아니면 실제로 깨닫기 어렵다’하시고 조계결(曺溪訣)에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이 몸 밖에서 부처를 찾고 밖을 향해 경전을 구하면서 안으로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안으로 경전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비결을 지어서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으로 마음과 경전을 지켜서 스스로 청정한 불성을 분명히 보게 하노라’하시고 또 이르기를 ‘경전이란 곧 부처가 되는 지름길이니 이 길로 가고자 하면 응당 안으로 반야행을 닦아서 끝까지 가야 된다’고 했다.
개운 조사는 실로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이룬, 경전을 몸으로 완전히 터득한 근대 우리 선종(禪宗)의 중흥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삼국시대에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현대 과학문명의 시대에 몸으로 신선(神仙)이 된다고 하는 우리민족의 신화나 전설을 체현한 신비스런 인물이 되는 셈이다.

《선문화》2000년 9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11/28/2007 2:57:06 PM

 

출처 : lees21
글쓴이 : 玄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