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정(경남유형문화제 제433호)
조선중기 화림재 전시서가 이곳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1872년 재건한 것으로, 거연은 주자의 시 접사잡영 12수 중에
거연아천석에서 딴것으로 "물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의 된다"는 뜻이다.
정면3칸 측면2칸 규모의 중층누각 건물로 주변의 기묘한 모양의 화강암 반석 폭이 넓은 골짜기,
흐르는 계곡 물등과 조화를 이루어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이다.
임헌회(1811~1876)는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 삼동(심진동, 화림동, 원학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 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도 거연정이 단연 으뜸이라고 거연정 기문에 적고 있다.
동호정(경남 문화재 제381호)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도호 장만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이곳에서 유영하던 곳으로 그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 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0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동호정 앞 200평 정도의 너럭반석을 "차일암"이라고 하는데, 차일은 태양을 가린다는 뜻이다.
사림문화가 한창 꽃피울 무렵 이곳에 차일을 치고 저마다 선비들의 기예를 겨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다.
그때의 흔적인 영가대, 금적암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군자정
조선시대 5현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이 유영하던 곳으로 정선 전씨 입항조인 화림재 전시서공의 5대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하였다.
농월정 (2003년 화재로 소실)
원래 농월정의 상판은 소나무로 지어졌고, 기둥인 12지주는 물이 차도 썩지 않는 밤나무로 세워졌었다.
본래 안의계곡이라 불리우는 화림동계곡에는 팔담팔정이라 하여 8개의 정자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3개의 정자만을 볼수 있다.
비록 농월정은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주위 풍광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천평 무릉반석위에 덕유산,괘관산, 황석산 등 천미터 고산에서 발원한 물이 금천을 이뤄 화림동계곡을 흐른다.
조선 중기때 학자이며, 의병대장이기도 했던 지족당 박명부(1571~1639) 는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다.
안의 성북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광해군때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한다.
1637년 지족당 박명부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농월정은 정면 3칸 즉면 2칸의 누각이며
가운데에는 한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두고 있었다. 농월정 정자 앞 천평반석을 "월연암"이라 했다.
달빛이 어리는 바위 즉 "달과 함께 노니는 곳"이라는...
달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음이다.
화림동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과 함께 노닌다는 이곳에 남명 조식 선생이 시 한수를 남겼다.
"푸른 봉우리 우뚝 솟고 물은 쪽빛인데
숨은 명승 많이 취해도 탐욕은 아니리
이 잡으며 어찌 굳이 세상사를 말하리
산수를 이야기해도 할 말이 많은데 "
산청 덕산에서 산천재를 짓고 살던 남명 조식 선생이 51세 되던해 여름에 제자들과 함께 화림동 계곡의 월연암을 찾아 쓴 시다.
이나 잡고 사는 옹색한 처지이나 산천초목을 벗삼아 명리를 버리고 은거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한 시다.
조선의 선비들이 왜 화림동 계곡을 좋아했냐 하면, 화림동 계곡은 다른계곡과 달리 풍부한 물이 대부분 너럭바위를 타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은 물소리와 소나무가지 사이로 빠져 나오는 바람소리와 어울려 시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