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박지원이 44세때인 1780년(정조5)에 팔촌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잔치 진하사로 베이찡에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기록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1~7권은 여행경로를 기록했고,8~26그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굴뚝,구들,여염집의 구조와 우물 가마 서의제도등 배울만한것이 있으면 자세히 서술하면서 모든 물건을 이롭게 쓸수 있도록 하여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져야만 덕을 바르게 할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폇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즐겨 찾던 휴양지라고 한며 북경에서 230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연암의 집안은 시문대가였으나 조부는 벼슬을 하였고,부친은 평생 벼슬을 하지 못했다 .
16세에 결혼을 한 박지원은 처숙인 이양천에게 수학하였는데,이양천은 박지원에게 중국의 역사책,사기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가르쳤다.박지원은 이야기속에 쏙 빠져들어 스스로 공부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연암은 3년동안 문을 나서지않고 열심히 공부 하였는데 경서 역사등 제자의 문집을 통독하고 천문 지리와 병상농업,경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19세에 이미 학계에 두각을 드러나게 되었다.
박지원은 북학파 실학자의 중심인물이고 그당시 고루하고 속된 선비들 소위 지배계급에 속한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여 가식과 허레를 버리고 실제적인 생산기술을 습득해아 발전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청국의 선진 문화와 발달한 물질 문명을 받아들어 과감하게 수용해서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보려는
탁월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당시 경직된 사회제도에서는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을수 있는 놀라운 개혁사상이었다.
북학파인 성호 이익일파의 학풍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들인 이용실사학은 청나라에서 본 물레방아를 도입하여
우리고장 안의에 물레방아를 설치 하였는데, "함양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도네"라는
민요도 생겨나게 되었다. 안의에 물레방아는1792년 연암 박지원이 53세에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여 년중 수량이 풍부한 용추계곡의
입구인 안심 마을에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실용화 하였다.
이용후생을 중요시하고 연구하여 과학기술을 우리 고장에 접목시켜 풍구,베틀 양수기 물레방아등 새로운 동력기를 제작하여 사용케 하였다.
열하일기 속에는 정치, 경제,문화, 풍습,의학,건축등 여러분야의알찬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다.
박지원은 이상수, 이서구,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박지원의 나이 50되던해에 부인은 먼저 죽고
그후에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이 19여년을 혼자 살다가 69세(1805)에 사망한다,
선생은 지방관청 행정가가 가장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할것으로 몇가지를 꼽아 실천했다.
1.가난한 사람들을 돕되 가난의 원인을 해결해 주는것.
2.상업과 농업의 중요성만큼 장사하고 농사짓는 사람의 인권과 명예를 존중해 주는것.
3.농민들의 노동력을 능률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청나라에서 여러가지 문물을 받아들여 농기계를 제작하여 보급하는것.
4.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의 고장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지역문화를 발전시키는것을 꼽았음
선생의 이같은 위업은 부패한 지방관청을 개혁하고 농민을 위한 행정가로서 안목과 구체적인 민초들의 입장을 살펴
선정을 베푼점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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